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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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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면/쟁점 기고

열린 공간, 그 무차별한 무대에서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5. 6. 16:36

   열린 공간, 그 무차별한 무대에서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생

김진영

 

  사람들에게 이동권은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가 국가의 개입 없이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 거주하고 이동할 권리를 의미한다면 이동권은 자유권에 더하여 때로는 시설의 구조 내지 형태를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사회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동권에 대한 여러 주장은 지나치거나 거친 것으로 치부되어버리곤 한다.

  나는 서울 소재의 대학교에서 학부 4, 대학원 3년을 보냈다. 사람들은 흔히 대학교를 작은 사회 라고 한다. 하지만 줄곧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에서 수학한 내게 있어 대학교는 충분히 거대한 세계였다. 아직도 캠퍼스 길을 외우고자 처음 학교를 방문했던 때만 생각하면 오금이 저릴 정도다. 결코 과장이나 농담이 아니다.

  일단 정문에서 내가 거주할 기숙사까지 부지런히 걸어도 대략 20~25, 사회과학대까지는 10~15분이 걸렸다. 점자유도블럭은 물론이고 랜드마크로 삼을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셔틀버스가 다닌다 해도 정류장을 찾기가 힘들고 마을버스처럼 방송이 나오지 않아 여기가 어디인지 주변인에게 묻지 않고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덧붙여 학생 식당이 여러 개 있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점자메뉴판은커녕 번호표를 뽑아 식판을 가져와야 하는 시스템이라 혼자 밥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강의가 이뤄지는 각 건물 내부에도 유도블럭은 없었다. 당연히 강의실의 호수는 점자로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이렇게 불편 목록을 나열할수록 내가 느낀 것은 무력감이었다. ‘정말 이 학교를 무사히 다닐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밤이면 잠에 들지 못했다. 앞서 열거한 온갖 불편 내지 불가능의 지표 때문에 나는 학교생활 내내 혼자일 수 없었다. 예를 들어 A라는 수업에는 누구와 함께 가고, 식사는 혼자 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결해야 하고, 동아리모임이 끝난 후에 기숙사까지 누구와 갈 것인지 나는 늘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다음을 생각했다. 그것은 일상이 아니라 일종의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물론 학교에서는 수업과 식사를 위해 도우미학생을 붙여줬다. 시간이 흐르며 친한 친구들도 생겼고 그들은 기꺼이 환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지독히 혼자이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렸다. A건물에서 B건물로 스스로 찾아가기 어려워 친구와 함께 하는 것과 혼자 갈 수 있음에도 굳이 친구를 찾는 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믿었다. 더구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부지런히 사람을 찾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독립적이지 못한 무엇이 된 듯하여 괴로웠다. 아무리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사는 게 사람이라지만 나는 스스로가 자유를 상실한 물건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기회가 날 때마다 학교의 길을 외우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매번 실수하고 엇갈렸다. 

  그러나 나는, 뒤늦게나마 나의 불편 내지 불가능이 정말 시각장애로 인한 것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시각장애가 있기 때문에 이동하기 어렵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곧 진실 또는 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예로 나는 학교 내부에서 특정 건물을 찾는 것에는 무력했으나 인천 소재의 집에서 학교가 있는 신촌까지 지하철로 이동하는 것에는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역사에는 대부분 유도블럭이 깔려 있었고, 열차는 스크린도어에 점자로 표시된 칸에 맞추어 정차했다.

  요즘 우리는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쉽게 접한다. 지하철에서도 한국어에 이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와 같이 다양한 언어로 방송을 한다. 우리는 외국인에게 한국에 왔으면 한국어를 해야지. 안 그러면 불편할 수밖에 없어. 알아서 적응해.’ 라고 하지 않는다. 반면, 내게는 많은 이들이 위와 비슷한 이야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건넸다. 그것도 차별이 아니라 친절의 이름으로. 이를테면 예산이 모자르기 때문에 시설을 바꾸기는 힘들고, 다만 친구들이 많이 도와줄 것이니 잘 조정해보라거나 비장애인과 섞여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식이었다. 

  학교는 공공시설이다. ,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몇몇 학생들을 위한 공간 외에는 기본적으로 방문자를 거절하지 않는다. 방문자가 정식적으로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장애학생에게는 여전히 닫혀 있다. 한국에서 대학교가 장애학생을 받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장애 중심적 시설이 불가피하다고 할 수는 있다. ,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이동권이 자유권에 더하여 사회권적 성격을 갖게 된 것도 철저히 비장애 중심으로 설계된 기존 시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동권은 오해받기 좋은 용어이다. 이동의 불가능을 상상하기 쉽지 않은 비장애인에게 이동은 어디까지나 열린 개념이다. 그렇기에 장애인이 이동권을 요구하는 순간 누가 움직이지 말래? 누가 감금이라도 했다는 거야?’ 하는 반응이 나오는 거다.

  아울러 이동은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보다 정확히는 삶의 핵심이다. 우리는 식물처럼 한 곳에서 자라지 않는다. 삶의 무대가 변하고, 그 무대를 능동적으로 선택하며 주체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누린다. 따라서 나는 이동권 보다는 생활 영역권 내지 삶의 무대를 선택하고 변화시킬 권리라고 얘기하고 싶다. 장애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열린 공간에서 그대와 자유로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만날 무대는 그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