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면/미니픽션

어쩔 수 없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4. 5. 13:24

-심아진(소설가ㆍ동화작가)

 

▲그림_유지안

 

그건 정말 뜻밖의 선물이었다. 다양한 색깔의 끈팬티 일곱 개가 든 상자를 열었을 때, 혜원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예전에는 그게 무슨 냄새인지 알았으나 이제는 익숙하다는 사실만 간신히 알아차렸다. 혜원은 끈팬티 같은 걸 입어 본 적이 없었고 요일별로 그런 걸 입고 싶어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고마워. 잘 받았어.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 왜 보냈어?

 

혜원이 세라에게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문이 떴다.

 

그냥 깜짝 선물이야. 입어 봤어? 사이즈 안 맞으면 바꿔줄게.

 

혜원은 팬티 한 장을 집어 펼쳐보았다. 그게 엉덩이에 걸쳐질지 어떨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잘 맞아. 고마워.

 

혜원은 두 번 연속 고맙다고 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 채 상자를 서랍에 넣었다. 서랍에는 그간 세라가 준 각종 화장품이며 팔찌, 목걸이 등의 액세서리가 가득 있었다. 물건들은 선물을 받은 혜원이 아니라 그걸 준 세라를 닮아 다소 예민해 보였다.

 

 

 

세라가 연중 가장 예민한 때는 혜원의 생일 전 일주일간이었다. 그녀는 다른 친구 몇몇을 초대하기도 하는 자리에 실수가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작년이나 재작년에 먹은 음식을 또 먹지 않도록, 유행을 따르되 너무 요란하게 선도하듯 보이는 식당을 잡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유흥 문화에도 맛집 검색에도 서투른 혜원을 대신해 세라는 유서 깊은 집안의 집사처럼 까다롭게 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세라가 혜원에게 주는 선물은 열심히 품을 팔거나 해외구매 사이트를 죄다 훑어 구한 물건들이었다. 반면 세라의 생일에 혜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혜원은 세라에게 창의적인 선물로 보답할 수 없었으므로, 물론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성의껏 돈을 썼다. 세라는 혜원의 마음까지 허술하지는 않다는 걸 아니까 기꺼이 받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세라가 챙기는 건 생일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혜원 외에 다른 사람들을 넣기도 빼기도 하는 크리스마스 이벤트와 연말 식사자리는 물론, 꽃 피는 철과 단풍 드는 철의 여행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혜원이 사귀는 남자와의 백일 기념일이나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도 챙겼다. 혜원은 자신을 대신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세라에게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었다. 선물 주고받기나 기념일 챙기기를 좋아하지 않아 애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일쑤였을 자신 곁에 세라가 있는 걸 행운으로 여겼다.

 

 

혜원이 샤워를 하고 나와서 보니 세라에게서 또 문자가 와 있었다.

 

내일 보자. 너 팬티 잘 맞는지 확인해야겠어.

성우 씨랑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보면 되지.

 

 

성우는 셋이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성우가 한 말을 전하면, 세라는 두 사람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제 마음을 몰라준다며 길길이 날뛸 게 분명했다. 언젠가처럼 갑자기 연락을 뚝 끊어버릴지도 몰랐는데, 혜원으로서는 그런 일 만큼은 절대로 일어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혜원은 주저하다가 문자를 보냈다.

 

그게, 내일은 좀…….

 

답문이 뚝 끊어졌다. 답이 곧바로 오지 않는 건 세라가 토라졌다는 뜻이었다. 혜원은,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보이는 걸 만들겠다던 신의 야심찬 계획 같은 게 단단히 어긋난 곳에 홀로 선 느낌이었다. 사십 초, 오십 초……. 혜원은 더 참지 못하고 제 심장처럼 까만 전화기 화면을 급히 두드렸다. 주말도 반납하고 주중에도 야근에 매달려야 할 형편이니, 시간을 달리해 두 사람을 한 날에 모두 만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너랑 저녁 먹고 성우 씨 나중에 만날게.

 

여전히 답이 금방 오지 않았다. 혜원이 전화기를 들고 방안을 오가는 동안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피곤했지만 세라의 문자를 확인해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휴대폰이 새초롬한 분위기를 풍기며 깜빡였다.

 

내가 집으로 갈게. 너 힘드니까 집에서 잠시 보지 뭐.

 

혜원은 집에서 보기가 불편했지만 더는 세라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래, 내일 보자.

 

혜원은 세라가 보낸 이모티콘을 따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성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세라가 집으로 오겠대. 내일 좀 늦게 와. 미안.

 

혜원은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그대로 베개에 얹고는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혜원이 퇴근하자마자 세라가 왔다. 한눈에도 무거워 보이는 김치통과 몇 가지 음식을 들고서였다. 고리 슬리퍼를 신은 세라의 발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남자가 발을 밟을 거 같은 예감이 딱 들었는데, 손에 든 게 무거워서 몸이 제대로 안 움직여졌지 뭐야.

 

계절을 지나치게 앞선 슬리퍼를 무심코 보아 넘긴 혜원이 세라의 발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며 말했다.

 

그러게 뭐하러 이걸 싸 들고 와. 집에서 간단히 시켜 먹으면 되는데.

 

너 집밥 좋아하잖아. 맨날 사 먹는 밥 질린다고 했잖아.

 

혜원은 기억나지 않았으나 세라가 그렇다고 하면 그러리라 생각했다. 십년지기 친구인 세라가 혜원에 대해 모르는 건 없었다.

 

 

 

소주를 네 병이나 나눠마셨는데도 세라는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성우 씨도 온다고 하지 않았어? 왜 여태 안 와?

 

……. 일이 좀 생겨서 많이 늦을 거래.

 

혜원은, 서리가 낀 안경 너머로 더듬더듬 시야를 확보하는 요령 없는 보행자처럼 시계를 찾았다. 열한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혜원은 세라가 화장실에 간 사이 성우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 곧 정리할 거야.

 

열두 시가 되자, 열 시부터 차 안에서 기다린 성우가 인내심을 버리고 혜원의 집에 들어섰다. 제가 오면 세라가 마지못해서라도 일어서리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리가 새로이 더 넓게 열렸을 뿐이었다. 세라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양념한 불고기를 익히기 시작했다.

 

 

 

성우는 혜원의 다섯 번째 남자 친구였다. 혜원이 이전의 애인들과 헤어진 건 모두 그들이 너무 헤퍼서였다. 예전에 세라가 취한 채로 혜원이랑 잘 지내야 해. 절대 헤어지지 말고. 알았지?”하며 혜원의 첫 번째 남자 친구를 껴안은 적 있었다. 남자 친구의 손이 세라를 밀어내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떨어지지도 않은 채 세라의 엉덩이께에 머물러 있는 걸 본 후, 혜원은 그와 결별했다. 두 번째 남자 친구는 느닷없는 혜원의 이별 통보에 억울해했다. 하지만 혜원은 그가 세라로 하여금 셔츠 단추를 꿰매도록 허락한 걸 용서하지 않았다. 같이 있다가 단추가 덜렁거리고 있는 걸 발견한 세라가 가방에서 반짇고리를 꺼냈다. “어서 벗어 봐. 잃어버리기 딱 좋아.” 세 번째 남자 친구와도 비슷하게 헤어졌다. 잔뜩 취한 세라가 어유, 근육 뭉친 거 봐.”라고 말하며 남자의 목 뒤를 주물렀는데, 혜원의 눈은 세라의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혜원은 남자가 아무런 저지를 하지 않은 데에 화가 났으나 그냥 싫어졌다고만 말했다. 네 번째 남자 친구는 세라가 자꾸 쿠키나 빵을 만들게 해서 헤어졌다. “대한민국 어떤 베이커도 세라 씨 솜씨를 따라갈 수 없을 거예요.” 남자 친구가 눈치 없이 자꾸 칭찬하는 바람에 세라는 날마다 무언가를 만들어 왔다. 세라는 어느 날에는 손가락을 데었고, 어느 날에는 눈길을 걸어오다 미끄러져 발목을 삐었다. 세라가 하는 모든 일은 혜원을 위한 거였다. 혜원은 세라와의 우정을 위협하는 남자들을 가차 없이 밀어냈다.

 

 

그런데 세라 씨는 왜 남자 친구 안 만들어요?

 

성우가 세라가 내미는 술잔을 연거푸 들이켠 후 물었다. 세라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안 만들긴 누가 안 만들어요. , 남자 많아요.

 

혜원은 세라가 사귀는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세라가 하는 사랑이 늘 위태로웠기 때문이었다. 남자에게 정리하지 못한 전 애인이 있거나 아내가 있거나 하는 식이었다. 세라는 자신에겐 왜 언제나 그런 남자만 꼬이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혜원도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언젠가 대학 동창 중 한 명이 세라에게 남자를 소개해 준 후 난리가 난 적 있었다. 남자를 만나고 온 세라는 이를 갈며 그 동창을 욕했다.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 다음에 만나면 죽여 버릴 거야.” 혜원은 세라가 그 동창을 정말 죽여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 동창이 세라를 두고 주제 운운하는 소리를 들은 혜원은 그 동창과 연락을 끊었다. 혜원이 세라 없이 다른 친구를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남자 친구 많다고요.

 

세라가 악을 쓰듯 다시 말했다. 살얼음 언 호수가 쩌적, 불길한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듯했다. 혜원이 성우에게 눈짓했다. 하지만 성우는 작심한 듯 혜원의 시선을 외면했다.

 

다음에 같이 한번 만나요. 맨날 이렇게 셋만 보니 재미없잖아.

 

혜원은 안절부절못하며 남자 친구를 나무랐다.

 

자기가 왜 세라의 남자 친구가 궁금해? 그만 일어나자. 너무 늦었다.

 

혜원이 식탁 위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세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혜원을 제지했다.

 

됐어. 나만 가면 되잖아.

 

몸을 잔뜩 웅크린 정적이 매섭게 공중을 선회했다. 혜원은 한기가 느껴지는 게 간밤에 머리를 말리지 않고 자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곧 세라가 일어서더니 혜원의 팔짱을 끼고서는 속삭였다.

 

너 팬티 입어 봐. 보고 갈래.

 

? 지금?

 

그래. 그거 고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온 인터넷 매장을 다 뒤졌어.

 

혜원은 그 팬티를 입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하지만 세라는 완강했다. 혜원이 마지못해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성우와 세라가 함께 서 있었다. 혜원이 저도 모르게 꺅 소리를 질렀다.

 

어때요? 우리 혜원이 예쁘죠?

 

세라가 성우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깔깔 웃었다. 그의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혜원은 익숙한 냄새를 다시 맡았으나 이제는 그게 뭐였는지조차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성우와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세라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혜원 역시 하나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