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면/미니픽션

도깨비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5. 4. 16:59

- 미니픽션

- 심아진 (동화가_소설가)

 

모의

 

신라 제25대 진지왕은 576, 병신해(丙申年)에 즉위했으나 정치 혼란과 황음(荒淫) 등의 이유로 재위 4년 만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출가를 결행했을 만큼 불심이 깊었던 선대 법흥왕, 진흥왕의 뜻을 좇지 않은 반불교적 처신에 대해, 화백회의가 내린 결정이었다.삼국사기는 진지왕이 폐위된 그해, 579년에 그가 죽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 죽은 진지왕은 살아생전 그가 취하려 했으나 취하지 못했던 여인 도화랑에게 나타났다. “살아 있을 때 지아비가 있다는 이유로 나를 밀어냈으나 이제 네 남편이 죽었으니, 더는 거절할 수 없으리라.” 진지왕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으므로, 여인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상의 것이 아닌 향기와 기묘한 빛을 띤 오색구름이 7일간 그 집을 뒤덮었다. 이후 도화랑에게서 생긴 아이는 가시처럼 뾰족한 코를 가졌다 하여 비형(鼻荊)이라 이름 지어졌다.

귀신과 인간의 자식인 비형랑은 신묘한 능력을 발휘하여 도깨비로도 불리는 두두리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한때 인간과 더불어 살았던 두두리들은 불국정토 신라의 엄숙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넘을 수 없는 숲을 넘어 깊숙이 숨어 버렸다. 익살맞고 쾌활한 그들은 무뚝뚝하고 경건한 인간들의 체취에 진저리를 쳤다. 인간들 역시 두두리들의 방종과 무질서를 참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더 이상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 비형랑만이 두 세상을 자유롭게 오갔다.

 

진지왕의 뒤를 이은 이는, 진지왕의 형이었으나 일찍 죽어버린 동륜태자의 아들이었는데 그가 곧 신라 제 26대 진평왕이다. 어느 날 진평왕이 비형랑을 궁으로 불러들여 말했다.

내 집사가 되어라.”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불교를 더욱 확산시키면서 율령을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시켜야 할 진평왕에게 삼촌 진지왕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끌어안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비형랑을 왕의 최측근 집사로 두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좋다. 내가 곁에 있겠다.”

15세 소년 비형랑이 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유롭기로 따지자면 아버지 진지왕 못지않은 비형랑 역시 갑갑한 궁에서 왕의 신하 노릇이나 할 위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상한 관계였다.

 

비형랑은 궁에서 일했지만 얽매이지 않으려는 본성을 좇아 수시로 궁을 떠나곤 했다. 진평왕은 비형량을 나무라지 않았다. 대신 왕은 밤마다 궁의 담을 넘어 먼 곳으로 사라지는 비형랑에게 50명의 용사를 붙였다. 밤을 낮처럼 다룰 줄 아는 비형랑을 놓치지 않고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 군사들이 아무리 용의주도하게 뒤를 밟아도 어느 순간 비형랑은 검푸른 숲 사이로 자취를 감추곤 했다. 더 지혜롭고 더 발이 빠른 정예군이 모였다. 풀잎 흔들리는 소리와 비슷한 발걸음 소리를 낼 수 있는 몇몇 군사들이 간신히 비형량의 그림자를 잡았다.

달빛 흥건한 황천 언덕에서, 키가 장승만 하거나 땅딸하거나 뿔이 하나이거나 다리가 하나인 두두리들이 질펀하게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송곳니를 드러낸 두두리가 혀를 회오리바람처럼 돌려가며 소리를 읊는가 하면, 산발한 두두리가 몇 개인지 알 수 없는 팔다리를 놀리며 춤을 추었다. 두두리 무리와 권커니 잣거니 술을 마시던 비형랑이 돌연 군사들 숨은 방향으로 이놈, 소리치자 담력이 떨어진 군사 두엇이 놀라 달아나기도 했다. 무리는 낄낄, 껄껄 웃으며 놀다가 여러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서야 아쉬운 듯 흩어졌다.

서라벌 장안에 비형랑과 두두리들에 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사람들은 오래 잊고 지냈던 흥 많은 무리가 몹시 궁금해졌다.

 

어느 날 진평왕이 비형랑에게 물었다.

신원사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을 수 있겠느냐?”

왕은 비형랑으로 하여금 두두리 무리를 이끌어 다리를 놓으라 명하고 있었다. 비형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귀교(鬼橋)라 불릴 것이다.”

깡깡 돌 깨는 소리, 칭챙 쇠 두드리는 소리, 쓱싹 나무 베는 소리가 서라벌 곳곳에 울려 퍼졌다. 다리는 하룻밤 만에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두두리들의 솜씨와 재주에 탄복했다. 몇몇 인간들이 두두리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그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두두리들을 흉내 내어, 왁자지껄 떠들고 흘를를 노래 부르며 으쓱 깨끼춤 추는 이들도 생겼다. 끊어졌던 인간의 세계와 두두리의 세계가 다시 이어지는 듯했다.

 

왕이 또 비형랑에게 요구했다.

정사를 돌보아줄 두두리가 필요하다.”

비형은 길달이라는 자를 추천했다. 길달은 두두리들이 구상한 온갖 것들에 대해 얘기했다. 인간계와 신계를 잇는 신목 모양의 금관, 땅을 품는 물, 즉 세 개의 섬이 있는 거대한 연못, 흐르는 술잔을 따라 시를 읊는 연회, , , 별을 관측하고 길흉을 점치는 탑, 적을 물리치고 병을 낫게 하는 피리 등 끝이 없었다. 사람들은 길달과 다른 두두리 무리에게 경외심을 품었다.

 

그러나 아직 충분치 않다. 흥륜사 남쪽에 누문을 세우고 길달로 하여금 지키게 하라.”

왕이 말하자 비형랑이 이전과 달리 다소 주저하며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왕은 단호했다.

반드시 그리 해야 한다.”

사람들은 다리를 만들어 두 세계를 소통시켰던 왕이 갑자기 문을 만들어 단절을 도모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밤마다 문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길달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수시로 문을 버려두고 숲으로 달아나 두두리 친구들과 어울렸다.

 

길달을 제거하라.”

길달을 죽이겠다.”

어느 날 왕이 다시 명했고, 비형랑이 이에 응했다. 비형은 여우로 둔갑해 달아나는 길달을 잡아 죽였다. 사람들은 어이없어했다. 왕의 명령이라고는 하나 친구이자 부하인 길달을 죽인 비형랑의 처사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가끔 악한 귀신을 쫓기 위해 비형의 그림이나 시를 이용하긴 했어도 더 이상 그를 옹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과 비형에게 희생당한 길달과 두두리 무리를 동정했다.

돌연 비형랑이 사라졌다. 소문 무성한 비형랑의 자취는 희붐한 달의 얼룩으로만 남았다. 동박새 둥지에 제 알을 심어 놓은 음흉한 자규나 밤이 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린 소쩍새만이 그의 행방을 알지 몰랐다.

 

2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진평왕은 자신이 이룩한 많은 것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신라가 불국토임을 입증하기 위해 가족들의 이름을 모두 석가모니 집안으로부터 따왔다. 기실 그의 이름 백정은 석가모니 아버지의 이름과 같았고, 아내의 이름 또한 마야였다. 진평왕은 철저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즉위 원년에 이미 그는 천사로부터 옥대를 하사받았다는 신화를 유포시키고 제석궁의 섬돌을 밟아 부서뜨림으로써 왕으로서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이룬 최고의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비형과 두두리들에 관한 것이었다.

왕은 자신의 사촌이자 사위인 용춘에게 술 한 잔을 따라준 후 물었다.

생각을 말해보라. 내가 법흥왕을 능가했는가?”

내성사신으로서 왕에 버금가는 실권을 지닌 용춘이 자신의 사촌이자 장인인 왕에게 미소를 보내며 답했다.

이차돈의 순교가 없었다면 법흥왕은 결코 석가의 뜻을 뿌리내리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왕께서 비형과 모의하여 두두리들이 사라지는 걸 막았고, 영원히 같이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과 두두리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밥을 할 때도 나무를 할 때도 심지어 용변을 보러 갈 때도, 사람들은 두두리를 떠올립니다. 이 땅에 석가의 율법이 스며든 것과 마찬가지로 두두리들 또한 사람들의 삶에 올차게 자리 잡았습니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었던 유약한 관심이 비형의 배신으로, 길달의 희생으로 인해 크게 자랐습니다.”

왕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비형은 두두리를 배신한 일이 없고, 아무도 희생되지 않았다.”

제가 살아 있고 길달 역시 죽지 않았으니 당연한 말씀입니다. 여우 한 마리가 죽었을 뿐이죠.”

20여 년 전, 비형이라는 이름을 썼던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 왕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냈다. 딸만 셋**인 왕이 용춘을 부러운 듯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아들 춘추의 인물됨이 예사롭지 않다더군.”

덕 있는 딸을 제게 주신 덕분입니다. 외손이긴 해도 춘추는 왕의 핏줄입니다. 물론 제 핏줄이기도 합니다만.”

사이좋은 장인과 사위, 동시에 사촌 간인 두 사람의 술잔에 초승달이 하나씩 떴다. 웃는 두 달이 두두리의 눈썹처럼 짓궂게 씰룩거렸다.

 

**첫째 딸 덕만이 진평왕에 이어 왕위를 계승하는 선덕 여왕, 둘째 딸이 천명 부인, 곧 용춘의 아내이다.삼국유사에 셋째 딸 선화 공주가 백제 무왕과 결

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사실로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림_유지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