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남>이 보여주는 소외의 재현 기제
<수리남>이 보여주는 소외의 재현 기제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신혜린 교수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은 지난 9월 공개 직후 비영어권 시청 순위 1위에 오를 만큼 인기를 끌었지만, 한편으론 수리남 정부 측의 거센 반발로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본 글에서는 드라마가 다룬 내용 즉 ‘중남미=마약의 온상’이라는 대한 편향적인 고정관념뿐 아니라, 그를 다룬 방식의 문제인 ‘재현 기제’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사실, 공권력의 오남용, 부정부패, 정경유착, 양극화에서 파생되는 빈부 격차 현실 등 드라마의 공간적인 두 축인 한국과 수리남의 현실은 많은 부분에서 중첩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미드 범죄물에서 묘사하듯 멕시코, 콜롬비아 등 중남미 국가들이 향정신성 식물의 생산과 유통의 본거지 역할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유독 수리남만 이상한 곳으로 표현되는 건 어딘가 이상하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모티프로 삼았고 제작진이 사과까지 한 상황에서 수리남이라는 국가를 일부러 콕 찍어 악의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닐 테고, 또 수리남은 서사의 배경일 뿐이지 수리남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실은 한국인들의 악행을 다루지 않나. 그렇기에 이 드라마가 결국은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논리가 근현대 세계사의 근저에 깊이 자리한 식민성의 폐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수리남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말은 드라마에서의 재현양상이 ‘그래도 괜찮은’ 것으로, 심지어는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아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재현(representation)이란 관점의 개입을 전제하기에 그 어떤 경우에도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이 관점이 반드시 의식적인 의도성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하기 쉽다. 감독, 작가, 제작진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문화·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무의식적 인식이 재현 과정에 반영된다. 어쩌면 의도하지 않았고, 당연하게 생각되고, 재현 기제 그 자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 시청자 입장에서도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들의 인식 깊은 곳에 당연한 패턴으로 자리 잡아 재현의 생태계 속에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반복적 재현을 통해 헤게모니가 곧 당위가 되고 현실이 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수리남>은 그러한 악순환의 결과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제목의 함의부터 살펴보자. 등장인물이 몇 번이나 언급하듯, 유럽, 미주, 아시아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낯선 중남미 중 수리남은 국내에서도 특히 인지도가 낮은 국가다. 소위 ‘낯선 곳’으로서의 수리남이 주는 거리감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중점적으로 조명되는 특성들이 수리남에 대한 시청자들의 인식을 좌우한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보여주는 수리남은 어떠한 곳인가? 우매한 대중, 부패한 공권력, 그리고 국가 기반 산업으로서의 마약이라는 측면들이 수리남이라는 국가와 그 문화, 그리고 사람들을 결코 ‘대변(represent)’할 수 없음에도 시청자는 이들만을 선택적으로 보게 된다. 과연 수리남의 대중이 우매할까? 그곳의 권력자들은 모두 다 착취의 화신이며, 마약이 판치는 무서운 나라일까? 비록 제작진이 의도한 바가 아닐지라도 드라마에선 그렇다고 말한다. 그럼 뭘 어떻게 보여주었길래 그렇다는 것일까? ‘어떻게(방법)’가 ‘왜(의도성)’에 선행할 수 있는가? 이에 <수리남>은 지금까지 시대와 문화권을 초월해 낯선 지양의 대상, 즉 타자를 위계적 우위의 입장에서 묘사해온 수많은 재현물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80년대 이후 일본(최근에는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이미지를 첨단 기술로 대변되는 미래의 상징으로 적극 활용하면서도 정작 ‘아시아’라는 모호한 정의로 뭉뚱그린 각국의 고유한 문화와 그 사람들은 여전히 미개한, 내지는 로봇에 가까운 비인간적 존재로 묘사해 온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듯이 오리엔탈리즘과 그 후신인 테크노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재현 기제를 통해 소외당해 왔던 우리가 무심결에 ‘수리남’으로 대변되는 소위 제3세계 국가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6회에 이르는 긴 장정 속에서, 수리남 사람들은 지극히 한정된 역할로만 등장한다. 그나마 개별 대사를 읊을 만큼의 비중이라도 있는 인물들은 부패한 관료거나 군벌이고, 나머지 인물들은 교회에서 한국어 찬송가를 어설픈 발음으로 따라 부르고 있거나 해변, 저잣거리, 일터 등에서 백그라운드 노이즈를 담당한다. 이들이 하는 말에는 자막이 붙지 않는다. 그 내용은 딱히 중요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수리남의 문화·지역적 특정성에는 딱히 큰 의미가 없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수리남의 지리적, 그리고 윤리적 낯섦이라는 이중나선 구조의 상징성을 서사의 틀로 삼되 해당 문화의 의미나 가치, 그리고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도구적인 재현을 통한 가치 비하로서 상징적인 지역색을 드러내는 용도로만 활용한다. 이는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의 전형이다. 생각해 보자, 콜롬비아, 푸에르토리코, 에콰도르 등이 아닌 꼭 수
리남이어야 했는가? 황정민이 연기한 조봉행이란 인물의 활약 무대가 하필 수리남이었고, 안기부의 불법 고문이나 룸살롱에서 행패를 부리는 경찰을 위시한 여러 장면에서 보이듯 우리나라의 60~80년대를 연상시키는 비민주적이고 후진적인 ‘먼 과거’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곳이라면, 드라마의 재현 양상에 부합하는 곳이라면 어디였어도 상관이 없지 않았을까? 어차피 그 장소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계나 군부 또는 범죄에 연루된 이들이 아닌 일반 대중이 어떻게 사는지 재현되지 않는데, 이 편향적인 대체 가능성, 그리고 그 근저에 자리한 의식적, 의도성의 부재가 담보하는 지속가능성이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