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면/쟁점기획

시대와 동반하는 교황, 그리고 보편교회

Jen25 2025. 6. 9. 15:11

기획의 변: 2025년 4월 21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만남의 신앙을 실천해왔던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이후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를 초월해서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한편 지난달에는 콘클라베에서 새로운 교황으로 레오 14세가 선출되며 새 교황이 가톨릭을 어떻게 이끌어갈지도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故프란치스코 교황을 추모하며 현대 사회에서 교황의 의미를 되돌아보기 위해 서울대교구 전승환 세례자요한·이영중 미카엘 신부를 만나는 한편, 손민호 프란치스코 신부의 글을 한데 담았다.

 

시대와 동반하는 교황, 그리고 보편교회 

 

4월 21일, 2013년부터 12년간 가톨릭교회를 이끌어 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다. 그는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 출신 교황이자 동시에 예수회 출신 교황이었다. 그는 1969년 사제서품을 받은 이후 빈민 사목을 지속적으로 해왔으며,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고자 청빈과 순명의 상징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교황 명칭으로서 처음 사용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임기 내내 평화를 촉구할 뿐 아니라 빈민, 성소수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와 가까이 지내왔으며,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살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편, 지난 5월 8일 ‘콘클라베’를 통해 새로운 교황 레오 14세가 선출되며 첫 미사를 통해 “세상의 어두운 밤을 밝히자”고 전하기도 했다. 이에 본지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 체제에서의 가톨릭교회와 앞으로 레오 14세 교황 이후의 변화에 대해 전망해 보고자 서울대교구 전승환 세례자요한 신부와 이영중 미카엘 신부를 만났다. 

 

▲전승환 세례자요한 신부 · 이영중 미카엘 신부 ⓒ 본인 제공

현대사회 속 교황 직위의 의미와 상징성

 

현재 세계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고, 기독교 안에도 여러 종파가 있으며, 각기 지도자격의 인물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톨릭 교회의 교황은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특히 상징성을 지닌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먼저 ‘교황’이라는 직위가 갖는 상징성과 의미는 무엇인지 물었다. 

  전승환 세례자요한(이하 전) “교황의 직위가 갖는 상징성은 현대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황은 본디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어지는 로마주교입니다. 로마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지이기도 하죠. 이러한 로마 주교로서의 교황의 상징적 위치는 고대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서 형성되었습니다. 로마 외에 5대교구가 있었지만 로마주교, 즉 교황의 수위권은 인정받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시아와 아메리카 정도를 제외한다면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교황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는 드뭅니다. 과거 교황이 영도하는 교회는 오늘날보다 국가나 시민사회와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고, 그리스도교가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죠. 각 지역 교회에서 중요한 사안을 해결하지 못했을 때, 로마 교회로 이관되어 결정된 적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교황의 영적인 위상과 의미, 카리스마는 공고했습니다. 비록 중세와 근대 시대를 거치면서 다소 아쉬운 모습들도 보이긴 했지만, 그 상징성만큼은 흘러온 역사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고 봅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 와서 교황의 위치는 이 과거 시대처럼 규정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황이라는 직위가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계속해서 세상 안에서 어떤 본연의 역할을 다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황과 로마교회는 단순히 어떤 포교나 교리 교육의 차원을 넘어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그 시대의 고통을 이제 함께 짊어지려고 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속한 아시아권의 아픈 역사와도 함께 호흡해왔죠. 식민지 지배, 독재에 의한 압제 속에서 교황과 그리스도교는 함께 투쟁했고,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 동행했다고 평가받죠. 그런 기억들이 있기에 오늘날까지도 보편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그 위상과 권위를 신뢰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된 ‘권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액체 현대』로 대표되듯 현대사회를 흔히 유동적인 사회라고 합니다. ‘탈권위’의 시대인 것이죠. 그런 대세 속에서 교황이 갖는 상징성, 영적 권위가 고리타분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갈수록 유동성과 불확실함을 더해가는 세태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영적 권위, 보편적인 가치를 찾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에도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권위는 필요합니다. 이 지점에서 현대 세계의 교황이 갖는 의미 또 가치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쇄신’ 역시 전통의 연장에서 해석되어야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출 이후 재임 기간 내내 ‘최초’의 기록을 여럿 세운 ‘개혁’적인 성향이 돋보이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교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을 계속해서 확대했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동성 커플의 축복을 허용한 점이 주목되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가 그 이전까지의 교황들과 차이를 가지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마치 이전 세대의 교회의 전통과 단절된 ‘혁명가’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간에 알려진 대표적인 오해입니다. 근본적으로 교황은 이전 시대의 전통을 교회의 이름으로 식별하고 수렴하고 통합하는 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활동이나 업적에는 분명 새로운 행보 역시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 위에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전통’의 연장선에서 현 시대의 징표를 발견하고 식별하고 판단하셨던 것이죠. 

  현 시대의 교황들이 근거하는 ‘전통’은 대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로부터 나왔습니다. 해당 공의회의 정신과 전통은 바로 ‘쇄신(aggiornamento)’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전에도 현대의 교황들(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2세)은 이 공의회의 정신을 현대세계 안에 녹여내고, 또한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최초의 개혁’을 한 것이 아니라 ‘쇄신’의 전통 속에서 방법론을 고민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만의 차별화된 방법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만남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늘 사람을 만나서 마주 보고 대화하고 함께 느끼고 공감하면서 동반하고자 했습니다. 그 지점이 사람들에게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러한 쇄신도 시대와 호흡하며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 외에 일반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했다고 받아들여지는 모습들, 이를테면 말씀하신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 확대나, 동성커플에 대한 축복도 그 결과물일 뿐 새로운 변화는 아닙니다. 교황이 갖는 식별의 눈이란 결국 복음에 근거합니다. 복음은 보편적이며 영속적이지만, 사람이 시대에 따라 고민하는 부분들은 다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특수한 부분들이 있을 수 있으며, 교황은 그 지점에 대해 그 시대의 ‘언어’로 답한 것입니다.”

 

이영중 미카엘(이하 이) “이 지점에 대해서 좀더 풀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의 번역어입니다. 복음은 보편적입니다. 그렇지만, 기쁜 소식이라고 할지라도 삶에 와닿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결국 복음의 ‘적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 속에 담긴 가치는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각 교황이 남긴 문헌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대마다 쓰는 단어나 글귀는 달라지고, 때때로 고민하는 지점도 달라지지만, 그 안에 담긴 정신은 동일합니다.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인해 가톨릭의 교리가 ‘변화’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커플에 대해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축복’을 내

린 것이지, 상상가능한 모든 것을 ‘허용’하도록 교리 자체를 바꾼 것은 아닙니다. 해당 사안으로부터 보아야 할 것은 교회의 변화가 아니라, 교리는 변화하지 않지만 현대 사회에 적용을 

할 때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함께 고민해 보면서 동반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죠.”

 

한국 가톨릭의 사회참여는 ‘진보’가 아닌 그리스도인 신앙의 실천

 

한국 가톨릭은 사회참여적이라는 시각이 있다. 지난 군사독재시절부터, ‘위안부’문제, 세월호참사 등에 있어서 지속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전임 프란치코 교황의 행보로 그러한 점이 다시 조명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어떨까. 

  “말씀하신 것처럼, 일견 한국 가톨릭은 사회참여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가 시대의 아픔에 함께하고 민중과 함께 상처 입고 같은 흉터를 받았고 또 진리를 말해야 할 때 목숨을 걸고 함께 외쳤을 뿐입니다. 그것이 독재에 대한 항거로 나타났는데, 그로부터 한국 가톨릭이 특히 ‘사회참여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성경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닮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결국 간단한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전 교황들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금의 한국 가톨릭 교회에 그 힘이 얼마나 큰지 다시 일깨워 주었습니다. 끔찍한 참사의 희생자들과 유족들, ‘위안부’ 피해자분들, 그리고 그 외에도 잊힌 사람과 일들이 너무나 많죠. 그런 상황에서 다른 나라 사람인 교황이 그런 일들에 관심을 갖고 발언을 하고 영향력을 준 것, 어떻게 보면 그게 한국 가톨릭 교회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여한 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톨릭의 사회참여를 특히 정치적인 차원의 가치가 연상되는 ‘진보/보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전승환 신부가 이야기 한 예수님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자세, 그리고 앞서 말씀 드렸던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추구가 우선된 행동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현상’적으로 사회참여가 두드러졌을지 모르지만 한국 가톨릭의 행보에는 위와 같은 신앙이 근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교황 레오 14세의 시대와 다가올 미래

 

새롭게 선출된 교황 레오 14세는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초의 미국 출신 교황이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과 마찬가지로 이민자, 빈곤층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콘클라베에 대한 소회와 레오 14세 선출 이후 세계 가톨릭이 어떠한 가치에 집중하며 나아갈 것으로 보는지 제언을 요청하였다.

 

  “해외 언론에서는 교황명에 주목해서, 레오 13세의 치적을 통해 신임 레오 14세의 행보를 추측하기도 합니다. 교황명에는 각 교황들의 지향점이 들어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레오 13세는 노동자의 인권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신 교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노동자란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현상’이 다르게 드러날 뿐이지 지켜야 할 가치는 동일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레오 14세 교황도 이전 교황들과 같은 가치를 지키기 위한 행보를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프란치코 교황이 큰 청사진을 그렸다면, 자신만의 카리스마로 세부적인 지점들을 실천하고 현실화하는 역할을 해 주실 것 같습니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문헌 중에 『복음의 기쁨』과 『사랑의 기쁨』이라는 문헌(‘권고’)가 있습니다. 이 문헌들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라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간적으로 보면 지금이 21세기인가라고 되물을 정도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 갈등, 전쟁과 같은 불협화음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죠. 이를 ‘공간’ 안에 한정되어 사는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고 타개책을 찾기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하신 것이 ‘시간’이죠. 앞서 언급된 ‘만남의 신앙’이란 것도 결국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행보를 신임 레오 14세 교황도 이어 가 주실 것이라고 봅니다. 유구한 ‘시간’ 속에서 계속 이어져 온 보편적인 정신은 이어질 것입니다.”

 

 

■ 천관우 기자 kw1045@naver.com

■ 이수진 기자 susuleemasur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