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한 공간-고향 속 무용함의 노스텔지어
유용한 공간-고향 속 무용함의 노스텔지어
-편혜영, 「아파트먼트」, 『계간 문학동네』, 2024 겨울호.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어느 대담 자리에서 한 건축가가 물었다. “요즘 친구들한테는 동네나 마을이라는 개념이 없죠?” 그러고 보면 ‘우리 동네’라는 말을 종종 사용함에도 특별히 동네라든가 특히 마을의 개념으로 거주지역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우리 아파트’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웠는데, 이 표현은 아파트가 재산 수준에 따른 계급적 지표로 굳어지기 이전 (순수하게 그런 의미로만 사용됐다고 할 순 없어도) ‘OO마을’과 같이 자신이 소속된 특정한 경계를 안내하는 말로 사용되곤 했다. 물론 이와 같은 소속 표현은 부모의 재산 수준에 따른 계급 차를 점점 더 분명하게 명시하는 지표로 이해되고 있고, 약 2010년대를 전후하여 그와 같은 거주지의 계층화 문제를 주제로 하여 몇몇 소설에서도 다뤄진 바 있다.
현재 부동산 시장의 주요 수요층이라고 할 수 있을 3040은 소위 ‘아파트 키즈’다. 그들 부모 세대가 산업화 이후 본격적으로 양산화된 아파트를 거주지로 삼아 그들을 양육했고,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자녀 세대는 자연스레 그들에게 익숙한 거주 형식인 ‘아파트’를 선호하는 듯하다. 물론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라는 주택, 빌라 등의 거주 형태와 비교할 때 주택 관리의 간접화에 따른 편리, 중산층으로서의 표지, 실거주 목적이 아닌 투자 개념(의 투기)에 가까운 재산 증식의 거래물이라는 측면에서 ‘거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그야말로 사회적 자본이자 계급적 징표다.
편혜영 작가는 2017년의 인터뷰에서 언젠가 ‘아파트먼트’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고 밝히면서 고향으로서의 거주 공간의 형식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녀는 “특정한 공간이나 자연이 아니라, 옛날식 아파트 같은 주거 형태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을 언급하면서, “도시인이 느낀 아파트라는 공간성은 투기나 부동산의 개념이 아니라, 주거지로서의 느낌이 더 강”하다고 말한다. 하나의 ‘공간’을 고향으로 삼는 감각은 노스텔지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라 할 만하다. 계급적 각성을 체험하게 되는 ‘고향-공간’으로서 아파트에 대한 접근은 모든 계급화의 환경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그리워하고 무엇을 내면화하면서 성장하는지 보여준다.
아파트라는 거주 공간을 전전하는 약 10여년 간의 일대기를 자녀의 일인칭으로 반추하는 형식의 이 소설은 ‘아파트’라는 공간에 뒤섞인 사회적 시선에 대한 학습과 더불어, 모든 것이 ‘유용’해야만 하는 공간 안에 무용함으로 착각된 노스텔지어가 어떻게 뒤섞여 있는지 보여준다. 반도의 남단에서 경기도를 거쳐 서울로 편입하며 겨우 마련한 구축 주택이 재개발 예정지에 포함되면서 새로 거처를 구해야만 했던 그녀의 부모는 ‘아파트’에 저마다의 욕망을 투영하고 좌절하길 반복하며 몇몇의 아파트를 전전한다. 그 여정의 한중간에 주택에서 처음 “시영아파트”로 옮겨가게 된 ‘나’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 애는 지금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J동의 장미아파트에서 이사 왔는데 그곳을 고향이라 칭했다. “고향이 있어?” 하고 내가 의아해하니까 그 애는 어렸을 때 산 곳은 고향이나 마찬가지라는 제 엄마의 말을 옮겼다. 나는 조금 놀랐다. 고향 같은 건 부모에게나 있는 줄 알았다. (...) 나는 아파트가 고향이라는 그 애의 말을 기억했다.(252면)
공간을 고향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형식은 내용과 관념을 구성한다. 거주 형식, 거주 환경은 ‘거주’에 대한 의미와 그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구성되는 자아 개념 및 타인과의 관계 형식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영향’의 내용이 획일적이지는 않다. 현대에 아파트가 얼마만큼 자본화된 방식으로 여겨지고 있느냐는 점과 인간의 존재 양식 사이에 유관성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일관된 형태 즉 세간에서 ‘아파트’를 다루듯 계급적 자본으로서 이데올로기화된 ‘아파트’라는 개념으로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중산층의 표본인 한 아파트에 정착했던 시절 아파트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며 소속감을 형성해가던 ‘나’의 엄마는 춤바람 난 이층 여자를 흉잡는 이야기를 듣던 중 (‘나’의 기억에 따르면 그녀답지 않게) “그게 어때서요?”라고 묻는다. 이후 ‘나’는 춤깨나 추는 엄마의 욕망에 대해 상상하며 통쾌함을 느낀다. 타인의 시선에 비치는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던 엄마가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오직 자신의 희열과 욕망에만 충실한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아파트’적인 생활 감각과는 일치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그 세계 속에서는 흉만 잡힐 뿐인 무용한 개인의 욕망을 하나의 탈출구로 상상한다. ‘나’에게 아파트는 타인의 시선에 부합해야 가치 있는 인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세속적 기준을 학습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런 곳이기에 그 세계에서는 무용한 가치를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10대 초중반 형편이 나아진 것도 잠시 ‘나’가 고등학생이 되자 가세는 눈에 띄게 기운다. 남의 눈에 비치기를 별볼일 없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 개발 예정 주택을 보러가겠다는 엄마를 따라 나선 ‘나’는 이내 인파에 치여 되돌아오며 엄마에게 첫 아파트 앞에 피어 있던 꽃의 흔들거림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고백한다. 안개꽃으로 오해했던 그 꽃이 “먹자고 심어놓은” 메밀꽃이었음에도 예뻤다고 말하는 엄마의 말에 ‘나’는 조금 울적해진다. 그러나 오직 실용과 투자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쓸모없다고 강력하게 말하는 공간에서 가장 무쓸모한 아름다움을 찾아 그리워하는 아파트 키즈의 일대기에서, 우리는 공간화된 고향의 시대에서 변함없이 우리가 좇아야 할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