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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다시 만난 세계 ③ : ‘벌새’의 시선으로 본 1994년 본문
다시 만난 세계 ③ : ‘벌새’의 시선으로 본 1994년
문학비평 용어 중 ‘믿을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는 소설 속 화자가 전하는 말을 대체로 진실로 여기지만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나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 그리고 어린아이 등이 화자일 경우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하기 어렵기에 이와 같은 개념이 만들어졌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독자와의 거리감을 조절하고, 독자를 속여 반전을 꾀하거나 반대로 독자에게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섭의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사연이 어른들의 사정을 모르는 어린 옥희의 눈을 통해 훨씬 애절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희가 문학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화자라고 해도, 그녀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믿을 수 없는 어린아이의 천진무구한 시선에 그친다. 반면 『제인 에어』 초반부의 화자인 어린 제인은 ‘믿을 수 있는 화자’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이후 성인이 된 제인이 어린 제인의 생각을 사실로 보장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현실에서든 문학이나 영화에서든 소녀의 시선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게다가 소녀의 시선으로 하나의 시대를 재현하는 작품은 더욱 적다. 하지만 유독 1990년대, 하면 나도 모르게 떠올리는 한 중학생 소녀의 이야기가 있다.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이다. “1994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의 아주-보편적이고 가장-찬란한 기억의 이야기”라고 소개되는 이 영화는 1002호에 사는 은희가 실수로 902호의 문을 열심히 두드리는 장면에서 시작해 성수대교의 붕괴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으로 끝난다. 아랫집 문을 두드리며 울 듯이 엄마를 부르는 순간부터 성수대교 붕괴 소식을 듣고 언니가 사고에 휘말렸을까 봐 초조해하는 순간까지, 은희는 사건의 경중(輕重)과 무관하게 온 마음을 다해 불안해하고 또 안도한다. 다행히 언니는 그날 추락했던 버스에 타지 않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은희는 짧게나마 그녀의 ‘세계’였던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중학생 아이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듯한 비극적 사건 후에도 은희는 또 살아간다.
영지의 죽음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특별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은희가 겪는 수많은 일상, 가령 부모님의 싸움이나 귀밑의 혹을 제거하는 수술, 친구와 싸운 은희에게 영지가 들려준 민중가요, 먼저 고백해놓고 “언니, 그건 지난 학기였잖아요”라면서 훽 돌아서는 후배까지 이 모든 나날은 하나의 장면으로 제시될 뿐 중차대한 서사적 인과를 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적 사건이 혹여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은희도 관객도 모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세계와 마주하는 것이다. 영화 속 사건들을 관통하는 것은 어쩌면 서사가 아니라, 이런 불안감의 정서일 테다. 은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1994년, 한국, 서울이라는 세계는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나뉘지 않은 채 모두 “아주-보편적이고 가장-찬란한 기억”이 된다.
하루는 84년생 선배가 어렸을 적 경험한 성수대교 붕괴와 IMF에 관한 기억을 지나가듯 말해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어느새 “아, 벌새 세대셨군요”라고 답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세상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사건의 경중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의 관점이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세상은 성수대교 붕괴와 성수대교 붕괴만큼 거대하고 중요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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