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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8면/연극비평 (32)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타인에게 공감한다는 것 연극 김나볏 연극평론가 공감이란 타인의 상황이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짐짓 헤아려 알 수 있을 때 우리는 ‘공감한다’고 말한다. 흔하게 쓰는 말이지만 곱씹어 볼수록 어려운 말이다. 타인에 대해, 타자 마음의 문제에 대해 내가 과연 얼마만큼이나 같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까. 타인의 일에 진심으로 공감한다면 이후 행동 또한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며 나서는 경우는 나를 포함한 주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다. 무대로 눈을 돌려보자. 여기 8년째 침대에 누운 채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비(Bea)’가 있다. 꽃다운 청춘의 나이인 20대를 지나고 있건만 비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침대 밖은커녕 스스로 몸을 뒤집기조차 어려운..
시몽과 끌레르, 그리고 너와 나를 수선하기: 김나볏 연극평론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는 ‘심장이 뛴다’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사람이 의식 없이 누워있을 때에도 심장은 속절없이 뛴다. 상상해보자. 여기 한 극장의 무대 위에 19세 청년 시몽의 심장이 뛰고 있다. 육체의 깊은 저 안쪽에서 밖으로 보내는 유일한 신호, 그러나 고요한 이 육체가 아직 작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다. 누워 있는 육체 속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을 우리는 함께 바라보는 중이다. 자, 계속해서 뛰는 심장을 이 젊은 육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봐야 할까, 아니면 그저 기계적인 박동음으로 치부하고 말아야 할까. 연극 는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동명 소설을 원작자와 각색가 에마뉘엘 노블레가 함께 각색..
8면 드라마트루그 딱지 벗기기: 심지후, 하은빈 세 사람이 극장에 모였다. 정확히 말하면 세 몸으로 분열한 한 사람이다. 손에 대본을 든 그들은 7년 전 이화여대 본관 점거 시위에서 있었던 일을 연극으로 올리고자 한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하므로 공연은 다소간 지연된다. 공연자들은 연신 대본을 펼쳤다 덮기를 반복하면서, 순서를 미루거나 서로를 제지하면서 한동안 저들끼리 옥신각신한다. 이윽고 그중 한 사람이 실은 무섭다고 고백한다. 이야기를 안 하면 죽을 것 같은데도 시작하기 두렵다고, “가장 솔직한 순간에 버림받기 싫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가장 솔직한 것은 몹시 날카롭고 위험하기 마련이다. 진짜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가피하게도 찔리거나 베이는 일, 혹은 찌르거나 베는 일이다...
무대 위 장애의 몸과 이어지는 질문들: 연극 , 하은빈 연극 과 에서 각각 가장 주의깊게 본 것은 황철호 배우와 하지성 배우다. 그들은 각각 지체장애를 가지고 휠체어를 사용하는, 각 프로덕션의 유일한 장애인 배우였다. 두 걸출한 배우의 활약을 눈여겨 보면서도 줄곧 생각했던 것은 이 두 공연이 각각 장애예술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 두 작품 모두가 장애예술가들이 비장애예술가들과 협력한 작품일 수는 있어도 장애예술작품이라고 여기지는 않으며 관람했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장애예술이란 무엇인지를 함께 밝혀야만 하리라. 장애예술의 정의를 둘러싼 복잡한 논의를 아우르지는 못하겠지만, 거칠게 말해보자면 주체와 주제의 측면에서 장애를 주요하게 포함하는 작품을 장..
어른이 없는 나라에서: 지금 아카이브, 하은빈 교단에 섰던 작자들을 생각한다. 앉아있는 모양만 봐도 처녀인지 아닌지 태가 난다던 선생. ‘부정한’ 여자들의 차림새와 몸매에 관해 불필요하고 장황한 묘사를 늘어놓던 선생. 똥 밟았다고 생각하며 그냥 넘기기에는 한두 사람이 아니었고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허튼 소리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신속하게 시선을 교환하고는 교복과 머리카락 사이에 끼운 줄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거나 교과서 귀퉁이를 찢어 욕을 주고받는 식으로 각자의 불쾌를 감당했다. 나는 경멸을 돌돌 말아 감추고 그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였다. 그들이 내어준 것들을 토씨 한 자 빠짐없이 외우고 그들이 출제한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아이였다. 그것은 암묵적인 공모 관계였..
스틸 미싱, 혹은 상실의 트레이닝 : 여기는 당연히 극장, 하은빈 얼마 전 사진집 하나를 선물받았다. 제목은 . 잃어버린 동물을 찾는 전단들을 모은 책이다. 사라진 동물의 사진이나 그림이, 제각기의 이름이, 전화번호가 차곡차곡 실려 있다. 주로는 개나 고양이지만 더러는 새나 거북, 페럿, 토끼이고 드물게는 용이나 유니콘이다. 생전 본 적도 없는 동물들이 점점 그리워지는 것이 난처하여 나는 책장을 휙휙 넘긴다. 마지막 장에 실린 전단에는 이런 질문이 거칠게 휘갈겨 쓰여 있다. “How would you feel If you lost something you loved?(사랑했던 것을 잃어버렸다면 마음이 어떻겠어요?)” 책을 덮으면 표지에는 마치 대답처럼 이렇게 쓰여 있다. 스틸 미싱… 연극 의 중심 사건은..
벗는 남자: 극단 에게, 하은빈 드라마투르그 지난 4월 말에는 한 이십대 남자가 화제였다. 미술관 벽에 붙여둔 값비싼 바나나를 먹었다는 남자. 그 일이 생각만큼 화제가 되지 않자 출신 대학과 학과를 들먹이며 '지인을 통해' 언론사에 자신의 퍼포먼스를 알렸다는 남자. 그의 행위가 얼마나 대단한 예술적 의미를 가지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카메라를 의식하는 시선과 상황을 즐기려는 듯한 어색한 웃음, 바짝 매인 채 존재감을 과시하는 명품 브랜드의 넥타이, 그가 연출하고자 한 바와 그가 실제로 노출한 바 사이의 틈에서 덜렁이는 자의식을 보는 일은 피로하고 떨떠름했다. 그즈음 신림중앙시장에서 올라간 공연 (이하 )은 내게 '바나나남'을 연상시켰다. 바나나남의 경우야 영상을 꺼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을 보는 일..
하은빈 내가 의 몸들을 구멍난(porous) 몸들로 읽은 것은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팬데믹의 시대를 살며 우리 모두가 얼마쯤 배운 사실이었으니까. 우리가 무수한 구멍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라는 사실. 보이는 것과 달리 우리 몸은 그리 분명하고 단단한 경계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는 명확히 경계 지어지거나 들어차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빈 공간들이어서, 그 사이로 공기가 들고 나며 불가피하게 접촉하고 뒤섞인다는 사실. “우리가 언제나 외부 세계를 우리 몸속에 끌어들이고 있음을 — 역으로 몸 속에서 생성된 것을 언제나 외부로 배출하고 있음을 —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구멍들이, 우리의 몸을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조건짓는다는 사실. 에 출연하는 서른 아홉 개의 몸을 하나로 꿰는 것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