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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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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8면/연극비평 (33)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하은빈 내가 의 몸들을 구멍난(porous) 몸들로 읽은 것은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팬데믹의 시대를 살며 우리 모두가 얼마쯤 배운 사실이었으니까. 우리가 무수한 구멍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라는 사실. 보이는 것과 달리 우리 몸은 그리 분명하고 단단한 경계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는 명확히 경계 지어지거나 들어차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빈 공간들이어서, 그 사이로 공기가 들고 나며 불가피하게 접촉하고 뒤섞인다는 사실. “우리가 언제나 외부 세계를 우리 몸속에 끌어들이고 있음을 — 역으로 몸 속에서 생성된 것을 언제나 외부로 배출하고 있음을 —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구멍들이, 우리의 몸을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조건짓는다는 사실. 에 출연하는 서른 아홉 개의 몸을 하나로 꿰는 것은 ..
헤어짐을 상연하는 애인들에게: 극단 애인, 드라마투르그 하은빈 극단 ‘애인’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은 십 년 전의 일이다. 이들이 올린 가 어떤 사건처럼 나를 압도했다. 이후로 멀리서나마 종종 보았다. 2019년에는 두산아트센터에서 올라간 에 대해 아쉬운 소리를 남기기도 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장애예술’에 나름 깐깐하게 굴고 싶었던 모양이다. 본전도 못 찾았다. 이듬해 이들의 를 보고는 비평이랄 것을 처음 시작했다. 머리를 쥐어뜯고 벽에 머리를 박으며 썼다. 지면이 생기고 고료가 나와서가 아니라 좋은 걸 좋다고 잘 말하고 싶었다. 지금도 같은 마음으로 쓰고 있다. (이하 )으로 곧장 질러오지 않고 애인과의 기억을 돌아본 것은 애인에게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애인의 연습실에서 공연 을 올리며, 김..
극장종말론자가 지은 그 대극장에서: 이혜령, 드라마투르그_하은빈 공연이 끝나고 혜령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왜 이렇게 많이 울어요. 보통 애기엄마들이 우는데.” 그리고는 혜령도 울었다. 의 마지막 회차가 막 끝난 참이었다. 신촌극장의 작은 창문으로 평일 한낮의 볕이 들었다. 공연을 마치기에도 ‘이렇게나 많이’ 울기에도 퍽 이른 시간이었다. 그날의 유일한 어린이 관객 봄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한바탕 운 얼굴로 멋쩍게 사진을 찍었다. 극장이 반기지 않는 관객으로서 겪었던 경험들이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우와 나는 늦는 관객, 까다로운 관객, 여러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관객이었다. 아무리 서둘러 출발해도 늘 아슬아슬한 시간에 도착하는 관객. 난처한 기색의 스태프들이 하우스와 연락을 주고받느라 분주..
믿지도 잊지도 못하는 어떤 안쪽 : 메테 에드바르센, 드라마트루그 하은빈 블랙박스 극장에 들어서면, 호리호리한 중년의 백인 여성이 무대 구석에서 관객의 입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객석은 다소 어수선하다. 나는 메테 에드바르센(이하 ‘메테’)을, 북유럽에서 온 저 저명한 백인 안무가를 조금은 경계하면서 반대편 가장자리에 앉는다. 무대는 텅 비어있다. 공연은 오래전에 초연되었고 많은 투어를 거쳤을 텐데도 그는 조금 긴장한 것 같다. 이윽고 메테는 무대 위를 걸어 다니며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table table table table table table table table…” 그러자 식탁이 생겨난다. 아니, 정말로 생겨나지는 않았다. 여전히 빈 무대다. 그저 주문을 외듯 나직하게 여덟 번 부르면서,..
다시 포개지지 않을 무구하고 연약한 약속들 : AMC, 드라마투르그 하은빈 (이하 ‘단명기’)의 연출 우지안은 연습에 들어가기 전 미용실에 갔다가 준비 중인 연극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이 연극에 대해서. 무당 ‘북두’의 점집을 찾은 열아홉 살 소녀 ‘구수정’은 입시 결과를 물으러 왔다가 날벼락 같은 예언을 듣는다. “야, 너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구수정은 반문한다. “…싫다면요?” 죽음보다 빠르게 움직이라는 조언에 따라 구수정은 남으로 남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들은 미용사는 말한다. “그러니까 믿음에 관한 이야기인 거네요.” “네?” “죽는다는 예언을 믿었기 때문에 시작되는 이야기인 거잖아요.” 우지안은 예쁘게 자르고 염색한 머리를 이고 그의 말을 생각하..
잠들지 않는 극장이 기다리며 꾸는 꿈 : 김은한, 드라마투르그 하은빈 지난 여름 관람한 공연 은 긴긴 수수께끼 같았다. 김은한이 곳곳에 심어놓은 위트에 속절없이 터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미로처럼 얽혀있는 이 공연의 길을 어리둥절해하며 지나왔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동안 이따금 미처 다 가보지 못한 그 미로의 길들을 밟아보았다. 막다른 길에 놓인 함정 같은 슬픔을 들여다보다가 그 바닥을 가늠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그 자유롭고 정처 없는 오해에 관해 쓴다. 공연은 매우 길고 상세한 사전 안내로 시작된다. 아니 사실은 시작되지 않는다. 친절하다 못해 장황한 안내와 그에 따라붙는 은한의 온갖 잡담으로 시작은 미뤄진다. 소화기의 빡빡한 핀을 뽑을 때 동원되는 기합 소리, 비상 상황 발생 시 요구되는 모순적인..
다시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 중, 하은빈 연극평론가 여름이면 찾는 공연이 있다. 극단 ‘지금아카이브’의 레퍼토리 공연 다. 2020년부터 여름마다 막을 올리는 이 공연은 김은한, 안담, 배선희, 신강수가 각각 쓰고 연기하는 네 개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파워 게임’이라는 테마로 오른 올해의 코미디 캠프에서는 특히 배선희의 을 인상 깊게 보았다. 온몸에서 화산처럼 터지는 정념에, 태연자약한 광기에, 희끄무레한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단 30분 만에 돌아버리고 돌아보고 돌아오고 돌보는 것을 죄다 해내는 이 미친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가 어려웠다. 두려움에 대한 선희의 몇 가지 고백으로부터 시작해보자. 그는 많은 것들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 가령 싱크대 선반의 칼이 보이면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우리 중 누군가가 그 작은 세계를 지어보일 때* 연극 하은빈 생각해보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자주 마음을 빼앗겼다. 픽션임을 숨기지 않기로 한 이야기들, 픽션이라는 사실을 향해 돌진하여 다른 길을 터놓는 이야기들, 이야기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결말을 바꿔버리는 그런 이야기들을 결국엔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건 이야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야기에 관한 말이 아니라 그 한계 자체에 머무르는 이야기에 관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결말이 이렇게 될 수도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이야기라는 게 사실 어떻게 끝나도 상관없을 만큼 무력하고 미약하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다. 이야기가 영롱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그것이 현실 세계의 차갑고 견고한 표면을 만났을 때 비눗방울처럼 깨진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