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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구멍난 몸, 드나드는 춤: 황수현, <카베에> 본문

8면/연극비평

구멍난 몸, 드나드는 춤: 황수현, <카베에>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5. 31. 11:51

하은빈

 

내가 <카베에caveae>의 몸들을 구멍난(porous) 몸들로 읽은 것은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팬데믹의 시대를 살며 우리 모두가 얼마쯤 배운 사실이었으니까. 우리가 무수한 구멍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라는 사실. 보이는 것과 달리 우리 몸은 그리 분명하고 단단한 경계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는 명확히 경계 지어지거나 들어차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빈 공간들이어서, 그 사이로 공기가 들고 나며 불가피하게 접촉하고 뒤섞인다는 사실. “우리가 언제나 외부 세계를 우리 몸속에 끌어들이고 있음을 — 역으로 몸 속에서 생성된 것을 언제나 외부로 배출하고 있음을 —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구멍들이, 우리의 몸을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조건짓는다는 사실.

 

 <카베에>에 출연하는 서른 아홉 개의 몸을 하나로 꿰는 것은 그 구멍을 흔들면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아-”였다가 “오-”가 되는, 이내 “희-”이거나 “흠-”이거나 “이-”로 바뀌곤 하는, 입이라는 커다란 구멍을 진동시키는 여러 가지 소리. 그 높고 낮은 소리들이 몸들을 일으키고 조우하게 하고 걷게 하고 여타의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주요한 원리다. 어두운 원형무대 안에서 몸들은, 다른 몸들로부터 들려오는 그 진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움직임을 바꾸어가며 마찬가지로 진동으로 응답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처럼 서로 소리내고 반응하는 이 몸들은 부유하는 내 연상 속에서 자주 장면들을 이루었다. 솟고 무너지고 구르는 돌들을, 소용돌이치는 물고기들을, 엉키고 뒤집히고 겹치는 꽃잎들을, 어디론가로 떠나는 쪽배들을, 엎드려 우는 사람들을 상상했다.

 그 어떤 장면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몸들이 관계하는 소리의 역학이 끊임없이 바뀌었던 까닭이다. 몸들이 만들어내는 광경 바깥으로 몇몇 몸들이 돌출하면 이내 나머지 몸들도 다르게 뒤척였다.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무엇인가를 빨아들이고 또 배출하는 몸들. 적극적으로 서로에게 침범당하고 또 침투하는 몸들, 그리하여 능동적으로 서로가 ‘되어가는’ 몸들. 프로그램북에 적힌 황수현 안무가의 말을 생각했다. “춤을 춘다는 것은 서로 다른 몸들이 만나 조율하고 적응하고 변형되어가는 과정, 결국 자신의 생각과 몸을 바꿔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말을. “사람들이 작품과 만나는 장소”로서의 극장을 넘어, 이제는 “무언가가 통과하고 흘러 넘치는 투과성을 지닌 공간으로서 극장을 사유”한다는 말을. 그 통과와 투과는 무엇의 있음이 아니라 없음에서, 차있음이 아니라 비어있음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구멍에서 비롯하는 사태다.

 

 지금껏 세계가 팬데믹에 대처해온 양상 속에서 몸이 가진 구멍들은 우리의 한계를 의미했다. 전례 없는 팬데믹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서로로부터 멀어짐으로써만, ‘거리두기’함으로써만 공동체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것이 ‘우리’를 지속하는 사회의 합의였다. 그러나 여전히 종결되지 않은 팬데믹 가운데에서 이 공연은 서른 아홉 명의 군무라는 급진적 선택을 통해 오늘날의 ‘극장’을 질문한다. 그리고 그 몸들을 매개하는, 공동체를 조직하는 방법으로서 몸의 구멍을 가로지르는 소리와 진동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무용수들은 입이라는 구멍으로, 그 ‘없음’으로 서로에게 드나듦으로써 서로의 있음을 발견하고 응답하며 춤을 춘다. 그로써 이 작품 <카베에>는 우리의 없음이, 구멍이, 결여가 우리가 가진 한계나 불능이 아니라 ‘우리됨’을 위한 존재의 조건일 수 있음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몸의 다른 역량일 수 있음을 보인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공동체가 아름답고 깨끗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위생에 대한 욕망으로 몸을, 구멍을, 공동체를 멸균하는 일이리라. 뭉치고 뒤얽히고 포개지는 몸들에서 비단 돌들이나 꽃잎 같은 아름다운 풍경만이 아니라 난교하는 몸들, 학살의 풍경, 지옥도 같은 끔찍한 장면을 연상하기도 했다. 구멍난 몸들인 채로 서로의 틈에 출입하는 일이란 애시당초 오염이나 감염에, 원시와 혼돈에 더 가까운 과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안무가의 말처럼 “차이와 다양성을 수용하기 위해 기꺼이 곁을 내어주는 것으로서의 춤추기”이자 <카베에>가 제안하는 “돌봄care”의 감각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문란을 닮았을 것이다. 우리의 구멍으로 드나드는 것은 비단 숨과 진동과 춤과 사랑만이 아니라, 땀과 침과 병균과 냄새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우리의 가장 불온한 것들과 함께 교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이 춤을 아찔하도록 살아있게끔 만드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문란이야말로 우리를 구할 것”이라는 더글라스 크림프의 단언처럼. 

 

 객석이 무대와 가까워 무용수들의 몸이 잘 보였다. 열린 귀, 호흡하는 코, 떨리는 입술, 뜨이고 감기는 눈. 그 사이로 들고 나는 소리와 숨과 춤. 그들의 진동에 넓고 깊고 높은 극장이 조용히 공명하고 있었다. 구멍과 구멍 간의, 숨과 숨 사이의 간격이 때로 영원처럼 길어 덩달아 숨을 죽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기척이 일었다. 그 떨리는 틈새들을, 모르는 삶을 향해 열리고 닫히는 구멍들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