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스틸 미싱, 혹은 상실의 트레이닝 : 여기는 당연히 극장,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 본문

8면/연극비평

스틸 미싱, 혹은 상실의 트레이닝 : 여기는 당연히 극장,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9. 4. 15:11

스틸 미싱, 혹은 상실의 트레이닝 : 여기는 당연히 극장,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

 

하은빈

 

 

 얼마 전 사진집 하나를 선물받았다. 제목은 <Still Missing>. 잃어버린 동물을 찾는 전단들을 모은 책이다. 사라진 동물의 사진이나 그림이, 제각기의 이름이, 전화번호가 차곡차곡 실려 있다. 주로는 개나 고양이지만 더러는 새나 거북, 페럿, 토끼이고 드물게는 용이나 유니콘이다. 생전 본 적도 없는 동물들이 점점 그리워지는 것이 난처하여 나는 책장을 휙휙 넘긴다. 마지막 장에 실린 전단에는 이런 질문이 거칠게 휘갈겨 쓰여 있다. “How would you feel If you lost something you loved?(사랑했던 것을 잃어버렸다면 마음이 어떻겠어요?)” 책을 덮으면 표지에는 마치 대답처럼 이렇게 쓰여 있다. 스틸 미싱

 

 연극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의 중심 사건은 어떤 개의 실종이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라는 다소 긴 이름의 개다. ‘델마라고 불러도 그로토프스키라고 불러도 오지 않고 반드시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라는 애매하고 장황한 이름에만 반응하는 그 개가 어느날 문득 그 긴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캐롤은 학교에 가지 않고 개를 찾아다닌다. 결석이 인정되는 정당한 사유는 단 두 가지 뿐이다. 질병 내지는 누군가의 죽음. 이미 상당한 결석일수를 쌓은 캐롤은 선생 홉킨스를 찾아가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의 실종 전단을 들이밀지만, 홉킨스는 개의 사망진단서를 제출하거나 죽은 개의 사진과 함께 캐롤이 겪는 상실감을 상세히 적은 부고를 공표하지 않으면 결석을 인정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캐롤은 뒤돌아 질주한다. 사라진 개를 찾아서, 혹은 자신이 속한 세계가 요구하는 부정의한 규범에 불응하여. 학교 혹은 사회 혹은 세계 엔 으레 수행해야 하는 애도 내지 추모의 절차와 방식이 있으며 이를 따르는 것은 캐롤의 존재나 관계를 인정받는 데에 도움이 될 터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 관행을 기어이 따를 수 없는, 그리하여 자신에게 요구되는 서사의 연극을 기어코 망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캐롤에게는 있다. 그 사정은 캐롤이 스스로를 루이스의 딸 혹은 아들이겠죠라고 소개하는 일과도, 캐롤의 젠더만큼이나 불확정적인 이름을 스스로에게 부여한 개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를 사랑하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 위에서 그 어느 편에도 귀속되지 않거나 그러기를 거부하는 존재들, 말하자면 퀴어한 이들의 상실과 죽음과 애도와 투쟁을 다룬다.

 

 한편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하수구 안에, ‘바닥 아래의 바닥에 갇혀 있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곧 죽을 운명이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그 개가 구조된 직후에 죽었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졌으니까. 그렇지만 또다른 한편으로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이미 죽어버렸음에도 무대 위에 계속해서 존재하고 발화한다는 점에서 아직 죽지 않은 존재이기도 하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자신을 구조한 인물인 린다가 컴퓨터 앞에서 내내 한 행거의 구매 후기를 쓰는 것을 지켜본다. 옷을 한 벌만 걸어도 쓰러져버리는 싸구려 행거에 관한 후기를. 후기가 계속 삭제되므로, 린다는 계속 새로 쓴다. 불완전한 행거에 대한 린다의 증언이, 마치 이렇게 세계에서 그저 손쉽게 지워질 수는 없다는 듯이 끝없이 다시 출몰하는 것을,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지켜본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린다의 후기를 모방해 작성한 사망진단서를 캐롤에게 내민다. 자신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하여 결석 사유를 인정받으라고, 엔터를 치고 학교를 졸업하고 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라고 캐롤을 설득한다. 델마도 아니고 그로토프스키도 아닌 개, 이미 죽었지만 동시에 아직 죽지 않기도 한 개,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 머물러온 개는, 선택을 유예하고 불확정적인 존재로만 남아온 그 개는 캐롤을 위해 자신에 관한 하나의 사실을 확정하기로 한다. 그것은 바로 지금 죽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하는 이가 속한 세계에서 추방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는 캐롤에게 이렇게 약속한다. 지금은 사라지더라도 7장에서는 너를 만나러 나타나겠노라고. 6장으로 이루어진 연극에서 그토록 다정히, 이렇게 너의 세계에서 손쉽게 지워지지만은 않겠다는 듯이,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그런 아름답고 불가능한 약속을 한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공연이 늘 그러하듯 이 연극 또한 시간은 마구 엉켜 있고, 서로 만날 수 없는 이들이 대화를 나누며, 텍스트와 그 발화는 이해나 이입의 여지를 연신 차단하는 방식으로 쓰여지고 연출된다. 공연의 무대는 객석으로 채워져 있고 공연자들은 객석 사이사이로 난 통로들을 오가며 줄곧 소리치고 때로 질주한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혹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를 찾아서. 관객은 그 어느 곳에서도 공연자들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없고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없다. 등 뒤에서, 어딘가의 통로에서, 관객은 각자가 잃어버린 것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전력을 다해 뛰어가는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헐떡이는 숨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와 진동은 사랑했던 이들을 잃어버린 마음이 자아내는 기척이다. 그 마음을 몰아세우고 신문하는 세계와의 어차피 패배할 싸움에서 떨어져나온 잔여물이나 부산물이다. 그 세계가 선심 쓰듯 내어준 비좁은 통로와 바닥, 틈새와 하수구에서, 공연자와 관객은 등지거나 가려진 채로 함께 있다. 극장에 모인 이들은 어떤 존재들이 서로를 어떻게 그리워하고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지를 부서지거나 결여된 방식으로만 전달하고 공유한다.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이들에 대한 진실을 전하는 가장 완전한 형식이라는 듯이.

 

 본래는 6장에서 끝나야 할 연극에서, 잠시 7장이 열린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가 캐롤에게 재회를 약속한 시간이다. 돌아온다 약속했으므로, 더 이상 찾아 헤매며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재회를 약속했기에 연극은 선뜻 막을 내리지 않는다. 생은 손쉽게 끝내버릴 수 없는 불확실한 다음 장으로 건너간다. 누군가 엔터를 치고 책의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그곳에서 모두가 잠시 기다린다. 사랑했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이를. 델마이면서 그로토프스키이기도 한 개를, 아니면 주로 개나 고양이인, 더러는 새나 거북, 페럿, 토끼인, 드물게는 용이나 유니콘인, 누군가의 딸이면서 아들인, 혹은 그 누구의 딸도 아들도 아닌 이를. 기다림의 침묵에, 무심히 전송되는 한낮의 부고에, 아무리 삭제된들 쓰여지기를 멈추지 않는 후기에, 끝없이 패배하는 싸움에, ‘혹은이라는 유예와 지연과 불확정성의 이름에, 사랑했던 이가 아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