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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무대 위 장애의 몸과 이어지는 질문들: 연극 <생활의 비용>, <미래의 동물> 본문

8면/연극비평

무대 위 장애의 몸과 이어지는 질문들: 연극 <생활의 비용>, <미래의 동물>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1. 10. 13:47

무대 위 장애의 몸과 이어지는 질문들: 연극 <생활의 비용>, <미래의 동물>

 

하은빈

 

연극 <생활의 비용><미래의 동물>에서 각각 가장 주의깊게 본 것은 황철호 배우와 하지성 배우다. 그들은 각각 지체장애를 가지고 휠체어를 사용하는, 각 프로덕션의 유일한 장애인 배우였다. 두 걸출한 배우의 활약을 눈여겨 보면서도 줄곧 생각했던 것은 이 두 공연이 각각 장애예술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 두 작품 모두가 장애예술가들이 비장애예술가들과 협력한 작품일 수는 있어도 장애예술작품이라고 여기지는 않으며 관람했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장애예술이란 무엇인지를 함께 밝혀야만 하리라. 장애예술의 정의를 둘러싼 복잡한 논의를 아우르지는 못하겠지만, 거칠게 말해보자면 주체와 주제의 측면에서 장애를 주요하게 포함하는 작품을 장애예술이라고 여기고 있다. 작품 내에서 장애정체성을 가진 이가 주권적 위치에 있으면서, 내용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장애와의 연관을 갖는 작품을 장애예술이라고 규정한다. 두 작품 모두 장애인 주체를 공연의 일원으로서 주요하게 포함하고는 있지만, 주제적 차원에서는 각각 장애를 소외하는 지점이, 혹은 장애와 무관해지는 지점이 있다고 여겼다.

연극 <생활의 비용>에서 황철호 배우가 연기한 장면은 전반적으로 흥미롭게 보았다. 황철호 배우가 갖춘 신체적 조건은 존이라는 인물에 더없이 잘 부합했으며, 존이 장애에 대한 제스의 선입견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쳐내는 장면이나 제스의 능숙한 활동지원을 통해 존이 몸을 씻고 외출을 준비하는 장면 등은 장애에 대한 깊은 경험과 이해가 없이는 만들어지기 어려운 장면들이라고도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작품이 인물이 요구하는 바로 그러한 몸을, 그리고 그 몸에서 비롯한 삶과 역사를 가진 배우가 그 인물을 체화하여 존재하고 발화하고 있는 광경을 충분히 오래 보여주고 있어 유의미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장면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생활의 비용>이 작품 안팎으로 비장애중심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거나 그리로 귀결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우선 이 공연에는 존 이외에도 장애를 가진 또다른 배역 안나가 등장하는데, 안나는 다른 비장애인 배우가 맡아 연기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다소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장애를 가진 배우 자체가 많지 않다는 점, 그러므로 현실적인 여건 상 캐스팅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이 장애인 배역을 연기하는 관행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그러한 연기가 앞뒤 가리지 않고 찬사를 받곤 하는 유구한 현상에 대한 회의가 작품의 감상을 줄곧 어지럽혔다.

또한, 결국 이 희곡의 초점은 최종적으로는 두 장애인 인물인 안나이 아니라 이들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두 비장애인 에디제스에게 있다. 특히 안나의 중도장애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안나와 에디 부부의 서사는 기존의 유구한 서사적 전통이 장애를 활용해온 전형적인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나라는 인물이 가진 장애와 그로 인해 촉발되는 죽음의 사건은, 에디라는 비장애인을 인간적으로 성장시키고 각성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존과 제스를 둘러싼 일화의 경우 비교적 덜 전형적인 장애 서사를 전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극의 진행 상 관객은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존보다는 겨울밤 속으로 뛰쳐나간 제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 또한 에디와 제스라는, 각각 장애인의 돌봄을 막 끝마친 두 비장애인의 조우를 그리는 데 길게 할애된다. 이 작품의 이야기가 여전히 기존의 서사에서 장애가 구사되어온 문법을 어느 정도 변주하여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그리하여 결국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장애에 대한 관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한편, <미래의 동물>은 무대 위에 있는 주체와 신체의 범주를 매우 광활하게 열어젖히고 있는 공연이었다. 그 확장이 너무나 넓은 영역을 아우르는 나머지, 이 무대 위에서는 장애라는 정치적 범주가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무대 위에서 장애를 가진 신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기에 앞서, 장애를 막론하고 배우들의 몸 자체가 이 공연에서 정말 필요한지를 질문하게 되는 공연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공연의 가장 중요한 출연자는 배우들이 아닌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텍스트의 프리젠테이션이 이 공연의 주된 미적 전략이며, 배우들의 신체와 그 발화는 부차적인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이 공연에서 배우의 존재 자체가 의문에 붙여졌다 보니, 장애인 배우가 출연했다는 사실 또한 내게 어떤 구체적인 의미로 잡히지 않고 부유했다. 장애 자체가 어떤 역할을 하지도 않고, 그 장애를 통해 관객에게 무언가 말하려 하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생활의 비용>에서는 적어도 황철호 배우가 존으로서 무대 위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했다면, <미래의 동물>에서는 반드시 하지성 배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다른 비장애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늘 특수한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장애가 이 공연에서 무차별적인 차이의 신체로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들었고 그것이 어떤 긍정적인 함의를 가지리라는 생각도 어렴풋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 회의적인 관점에서 말해보자면, 적어도 이 캐스팅이 다양성 쿼터이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반드시 이 두 작품이 장애예술로 읽혀야만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품었던 것 같다. 해당 작품들이 장애예술이 아니라고 해서 그렇게 문제가 될까? 혹은 무언가 결여한, 모자란 작품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애인 예술가들의 작업이 반드시 장애의 맥락에서만 독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장애인 예술가들이 여러 영역을 아우르는 것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장애인 예술가들이 더 큰 무대에 서거나 보다 좋은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환경이 보장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점에서 두 배우분들의 왕성한 외부 작업 소식이 반갑고 즐겁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장애예술이 아니라면 어떤 작품이 장애를 가진 몸을 오롯이 존중하고 사유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장애의 경험이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는, 장애를 가진 몸들의 정치적이고 미적인 가능성을 향해 급진적으로 나아가는 장애예술을 꿈꾼다. 때마침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설립, 운영하는 국내 최초의 장애예술인 표준공연장 모두예술극장1024일 문을 열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풍요롭고 또 섬세한 장애예술의 세계를 상상하고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