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딱지 벗기기: 심지후, <비밀의 화원> 본문

8면/연극비평

딱지 벗기기: 심지후, <비밀의 화원>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2. 6. 00:03

8면 드라마트루그

딱지 벗기기: 심지후, <비밀의 화원>

 

하은빈

 

세 사람이 극장에 모였다. 정확히 말하면 세 몸으로 분열한 한 사람이다. 손에 대본을 든 그들은 7년 전 이화여대 본관 점거 시위에서 있었던 일을 연극으로 올리고자 한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하므로 공연은 다소간 지연된다. 공연자들은 연신 대본을 펼쳤다 덮기를 반복하면서, 순서를 미루거나 서로를 제지하면서 한동안 저들끼리 옥신각신한다. 이윽고 그중 한 사람이 실은 무섭다고 고백한다. 이야기를 안 하면 죽을 것 같은데도 시작하기 두렵다고, “가장 솔직한 순간에 버림받기 싫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가장 솔직한 것은 몹시 날카롭고 위험하기 마련이다. 진짜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가피하게도 찔리거나 베이는 일, 혹은 찌르거나 베는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공연이 싸움에 관한 이야기인 것은 이 극이 비단 실제의 투쟁을 다루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진실을 말하기로 했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그 진실을 극장에서 공연으로 올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공연은 저마다의 진실을 둘러싼 각개전투이고, 재현되는 외상이 발생시킬 필연적인 유혈사태다. 어쩌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상처받을 일뿐만 아니라 상처를 줄 일, 버림받을 일뿐만 아니라 기어이 무엇인가를 저버리는 일일 테다.

 

막상 출발하자 이야기는 파죽지세로 흘러간다. 불현듯 들려온 미래라이프 대학 평생교육원 설립 소식, 그에 따라 열렸던 만민공동회, 처음에는 항의방문이었으나 어느새 점거로까지 이어진 본관 시위, 학생자치를 신뢰하고 변혁이란 말에 열광하던 를 혼돈으로 빠뜨리는 이른바 똥싸개 사건구급차 사건”, 1분만에 1000만 원의 후원금을 달성시키는 화력을 보이던, <다시 만난 세계>를 열창하며 성난 파도처럼 넘실거리던 , 동시에 시위 참여자들에게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씌워 익명의 벗 1”이 될 것을 강요하던, 운동권을 색출하고 시위를 탈정치화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던 , 권한과 책임의 소재를 둘러싸고 벌어진, 몇 시간이고 접점 없이 부딪치고 휘발되던 말들과, 하릴없이 성큼성큼 다가오던 아침의 속도까지이 모든 것들이 거센 속도로 몰아친다.

 

그러나 맹렬한 속도라고 해서 그 이야기들이 매끈하거나 유기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사건들의 순서는 때로 앞뒤가 엉켜 있고, 시위에 관여된 여러 이들의 목소리는 실로 촘촘하게 얽히고 꼬여 있어 한눈에 알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투쟁하는 이들의 형상이 구체적인 얼굴과 몸을 가진 학생들에서 점차 이화여대 온라인 커뮤니티인 비밀의 화원익명 유저들로 옮겨감에 따라, 어느 순간부터는 그 누구도 이 사태의 인과와 작용과 여파를 종잡을 수 없게 된다. 과연 무엇과 무엇이 서로 상관관계 속에 있었던가?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였나? 이들 중에 정녕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을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세 공연자마저도 이따금씩 공연을 멈춰세우고 서로에게 묻는다. “이게 먼저였나?” “다음 장면 이거 아닌데.” “순서가 이게 맞아?”

 

그러므로 언뜻 보기에 이야기는 종종 이곳저곳으로 새어나가거나 엉뚱한 곳으로 튀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공연자들은 때로 이야기의 흐름으로부터 잠깐 물러나 상황을 통과하는 , 아마도 뒤꼍에 밀려나 있었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거나 사소하다고 치부되었을 기억들을 줍는다. 시위에서 자리를 지키느라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일, “운동권인 줄 알았다면 만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에 붙잡은 팔, 그 팔에 흥건했던 땀, 표정에 어렸던 당혹스러움, 신나게 몸을 흔드는 수어통역사의 몸짓에서 느꼈던 희열. 한편으로 공연자들은 극중극으로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상연하거나, 때로 연기하기를 멈추(기를 연기하)고는 서로 장면을 상의하고 연극 연습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그리고 있는 모든 장면이 거짓말과 거짓말을 주고받는 약속으로서의 연극임을,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허구에 불과함을 거듭 부각한다.

 

이렇듯 이야기가 저 스스로 흔들리고 분열하며 스스로를 고쳐 쓰거나 연신 번복하는 것은 사실관계의 복잡성 때문만은 아니다. ‘를 세 쪽으로 쪼개버린 외상의 자장 속에, 이를 공적인 장에서 재연하는 일의 여파를 미처 다 알지는 못한다는 데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공연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공연의 첫 장면에서 제시되었던 망설임과 저어함은, 어쩌면 외상을 상연하는 과업에 따라붙을 그 모든 부상을 예고하는 트리거 워닝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연은 강박적으로 어디론가로 계속해서 나아가려 하지만(“움직여”, “가야지”, “, ”), 관객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공연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을 따라 일정하게 나아가고 있다기보다는 어느 구간에서 되풀이되는 갇힌 시간 속에서 딱지처럼 더께더께 쌓인 기억의 겹을 한 꺼풀씩 치열하게 벗기고 있는 작업에 더 가깝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움직여 간 결과 도착한 공연의 가장 깊은 지점은 의 가장 마음 깊은 곳에 고인, 밖으로 뱉어지지 못했던 속말이다. “너네, 너무 미웠어. 좋아했던 만큼 미웠어. 나는 두려웠어. 두려워서 끝내고 싶었어.” 그 말을 내뱉은 공연자는 무대를 버리고 자리를 뜬다. 그는 공교롭게도 첫 장면에서 가장 솔직한 순간에 버림받기 싫다는 대사를 발화했던 이이기도 하다. 그것이 가장 연약한 말이었던 것은 곧 그 말이 누군가를 저버리는 말,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말이어서다. ‘에게 이 연극을 만드는 일의 의미는, 무엇에 어떻게 상처받았는지를 단순히 되짚을뿐만 아니라 기꺼이 다시 상처를 받을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데에,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참았던 말을 한다는 점에서는 이제 상처를 주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데에 있다. 상처를 받으면서 홀로 남겨지기보다,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타인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과거로.

 

공연은 계속해서 속삭이며 어디론가 향할 것을 촉구하지만, 어쩌면 때로 우리가 의지적으로 향해 가야 할 곳은 정확히 우리 자신의 과거다. 상처를 봉합하고 과거를 내려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주고받고 타인에게 침범하고 또 침투당하며 과거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 거듭 딱지를 벗겨 붉은 새살을 드러내듯, 공연은 연신 자기 자신을 다시 고쳐 세 차례나 막을 다시 내린다. 그 세 번의 엔딩이 이루어지는 동안 공연자들은 무대에서 객석으로, 객석에서 극장 밖으로 떠나간다. 이제 빈 무대만이 객석을 마주보고 있다. 움직여 떠나가야 할 것은 관객뿐이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