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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타인에게 공감한다는 것 본문

8면/연극비평

타인에게 공감한다는 것

Jen25 2024. 4. 8. 15:29

타인에게 공감한다는 것

연극 <Bea>

 

김나볏 연극평론가

 

 

 

공감이란 타인의 상황이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짐짓 헤아려 알 수 있을 때 우리는 공감한다고 말한다. 흔하게 쓰는 말이지만 곱씹어 볼수록 어려운 말이다. 타인에 대해, 타자 마음의 문제에 대해 내가 과연 얼마만큼이나 같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까. 타인의 일에 진심으로 공감한다면 이후 행동 또한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며 나서는 경우는 나를 포함한 주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다.

 

무대로 눈을 돌려보자. 여기 8년째 침대에 누운 채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Bea)’가 있다. 꽃다운 청춘의 나이인 20대를 지나고 있건만 비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침대 밖은커녕 스스로 몸을 뒤집기조차 어려운 상태다. 그런 비에게 어느날 레이가 나타난다. 레이는 비의 어머니인 캐서린이 매의 눈으로 심사해 선정한 새로운 간병인이다. 말 많고 부산스러운 레이는 어딘가 어설프지만 선함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엄격한 어머니 눈을 피해 레이와 비 사이에서 싹트는 우정 이야기가 공연 내내 그려질 것만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같은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공연은 더 깊은 곳을 향해 달려간다.

 

병상이 놓여있는 비의 방이 무대 배경의 처음이자 끝이지만, 예상과 달리 공연은 꽤나 역동적으로 흘러간다. 북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겸 연출가 믹 고든이 쓴 공연 대본 자체가 인물의 겉모습이 아닌, 인물의 마음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태를 중심으로 인물을 표현하는 이 방식은 영리하게도 병상에 누운 신세인 비로 하여금 움직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 비를 침대에서 주로 머물게 함으로써 중환자임을 암시하면서도 비가 침대에서 방방 뛰고 때로는 침대밖을 살짝살짝 벗어나는 정도는 허용함으로써 비의 마음 속만큼은 여느 20대 여성과 다르지 않음을 효과적으로 알린다.

 

흥미로운 점은 비와 캐서린이 레이를 대하는 방식이다. 레이를 처음 만났을 때 둘은 모두 돌아봐라는 표현을 하며 레이의 겉모습을 상세히 살핀다. 비는 심지어 핸드백을 들고 다니며 한쪽 발로 서는 습관을 지닌 남자 간병인 레이의 모습에 대해 희한하다는 듯 콕 집어 이야기하기도 한다. 둘은 이내 서로 마음을 터놓고 비가 레이로 하여금 어머니 캐서린에게 자신의 죽음을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까지 부탁하는 사이가 되긴 하지만 말이다.

 

스스로 게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이인 레이가 공연 중 여러 번 뱉는 우린 모두 마음 맹인이라는 말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레이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 말이야말로 이 공연을 통해 작가가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싶다. 이처럼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안락사의 문제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는 서로 간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담아내고 있다.

 

한편으로 작가는 연극 혹은 예술의 역할에 대한 모종의 암시도 잊지 않는다. 공연 중 레이는 비에게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연기하듯 읽어주는데 이는 비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킨다. 제 아무리 레이가 실감나게 연기를 하더라도 비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혹은 예술은 비로 하여금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결심과 실행으로 이끄는 중요한 트리거로 기능한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레이와 캐서린이 마침내 비의 진심에 공감하게 된 이후, 그래서 비의 선택을 모두가 존중하고 돕게 되는 상태에 이른 이후,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 프로시니엄 무대 위에 얼핏 감옥처럼 세워져 있던 벽채들은 마침내 허물어지듯 사라진다. 감옥살이를 하는 것만 같은 비의 현 상태를 애써 감추려는 듯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반짝이는 귀걸이 장식들도 모두 함께 사라진다. 앞서 <왕서개 이야기>, <붉은 낙엽>에서도 선보였던 이준우 연출가의 명료한 극 해석은 이번 연극에서도 무대장치들과 잘 맞물린다.

 

어느새 비는 벽채가 사라지고 푸른 들판으로 바뀐 무대를 벌처럼 붕붕 날아다닌다. 비와 캐서린, 레이가 함께 만들어낸 이같은 결말을 통해 작가는 관객에게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가 모두 '마음 맹인'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공감이 시작된다고. 공감하는 순간 너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열릴 수 있다고. 마음의 소리가 세상의 기준과는 조금 다르더라도 어쩌면 그 무엇보다 진실하고 정직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