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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아주 사소하지만 중요한 ‘역사탐험’ 본문

8면/연극비평

아주 사소하지만 중요한 ‘역사탐험’

Jen25 2024. 6. 14. 15:24

아주 사소하지만 중요한 역사탐험

 

연극 <역사탐험연구소>

 

김나볏 연극평론가

 

 

올해 극단 그린피그는 월간 역사시비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매달 새 싱글음원을 발표하는 월간 윤종신처럼 올 한 해 다달이 연극을 만들어 관객과 만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프로젝트명에서 눈에 띄는 것은 월간외에도 또 있다. 바로 역사시비라는 단어다. 역사적 사건 12가지를 펼쳐 보인다는 의미도 되고, 역사의 시시비비를 가른다는 뜻도 가능하다. 더 나아가자면 역사에 시비를 거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 이름이다.

 

ⓒ 그린피그

 

9명의 연출가가 공동창작을 통해 12개월을 나눠 맡는다. 5월의 역사시비 프로젝트는 박해성 연출가가 맡았다. 연극의 제목은 <역사탐험연구소>. 연극 애호가라면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다. 박해성 연출가가 이끄는 상상만발극장의 스핀오프 격 프로젝트그룹 '응용연극연구소'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연극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로운 형식,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들을 담기 위해 마치 부설처럼 운영되는 그룹인데, 박 연출가는 이번 역사시비 프로젝트에 이 연구소의 이름을 호출하고 연구원들을 그러모았다.

 

대학로 예술공간 혜화에서 펼쳐진 이번 공연엔 김현, 박수빈, 이지원, 정연종, 조서연, 최지현 등이 연구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 중 5명은 배우로 무대에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원이라 명명한 것은 이들이 역사탐험연구소의 연구원으로서 연기 외에 이 공동창작 과정에도 적극 동참했기 때문이다.

 

다시, ‘역사시비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응용연극연구소 팀은 앞서 언급했던 역사시비의 여러 의미 중 역사에 시비를 거는방식을 택한 듯하다. 공연 제목만 보면 굵직한 서사를 바탕으로 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펼쳐질 것 같지만, 막상 실제 공연은 그렇지 않다. 이곳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거시적 역사가 아닌 미시적 역사에 집중하고 있다.

 

소극장 예술공간 혜화에 들어서면 무대 벽면 두 곳에 커다란 스크린이 드리워져 있다. 무대로 눈을 돌리면 각양각색의 의자와 책상들이 눈에 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연구소라기엔 너무 허름한 지하 자취방과도 같은 풍경이다. 관객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공연이 시작되면 이곳으로 연구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한다. 마침 오늘 첫 근무를 시작하는 신참직원도 있다. 이 공연의 콘셉트를 모르는 건 관객뿐만은 아닌 듯해 다행이다. 낯선 공간에서 서성대는 이 신참 직원을 따라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한다.

 

다만 가르쳐주는 것은 없다. ‘무엇을 하면 될까요?’라고 연신 묻는 신참에겐 눈치껏 배우라는 답변만 돌아온다. 관객도 마찬가지. 눈치껏 이 공연의 콘셉트를 익혀 가면 된다. 다행히 힌트가 주어진다. 무대 뒤편 스크린에는 이들 연구원들이 탐험 중인 개인의 역사가 펼쳐진다. 각 연구원들이 노트북에 열어둔 웹브라우저 화면이 번갈아가며 투사되는데, 내용은 제각각이다. 선임들은 SNS와 블로그 등 인터넷 공간에서 각자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탐구의 대상이 알고 보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각 연구원은 노트북 앞에 앉아서 수십 년 전부터 최근에 이르는 웹상의 자기 기록을 살피고 있는 중이다. 필부필부의 일상이니 뭐 대단히 특별한 게 나올 리 없다. 한 연구원은 자신이 언젠가 올려놓은 곱창전골볶음 동영상을 시청하다 느닷없이 유물을 구하러 간다며 편의점에서 곱창볶음을 사와 즉석에서 시식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복근 사진이나 여행 사진 등을 두고 연구원들이 모여 과시하려는 것’, ‘포즈가 인위적이네하면서 시시껄렁한 갑론을박을 펼치기도 한다. 이들 모두는 자기 자신의 사진을 탐구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객관적 시선을 취하며 연구원으로서의 입장을 지켜낸다.

 

이들의 저마다 다른 직급 혹은 위계질서는 캠핑의자, 앉은뱅이 의자, 빈백 의자, 이동형 간이 의자 등으로 간접적으로나마 표현이 되는데, 스크린상의 내용을 보면 어찌 되었건 이들 모두 연극인이라는 공통점은 감지된다. 여러 화면들이 눈길을 끌지만 그 중 가장 압도적이었던 것은 아마도 한 연구원의 국민은행 계좌 화면이 아닐까 싶다. 가장 편한 빈백 의자를 차지하고 있고 늦게 출근해도 아무도 뭐라고 대놓고는 말 못하는 가장 고참급 연구원의 계좌인데, 잔액은 초라하다. 사람과 세계를 탐구하는 연구원이라 자부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관리하는 데는 서툰 듯한 이들의 모습에서 오늘날 대학로의 연극인들의 모습이 교차된다. 이처럼 이 연극에선 사소한 내용인 듯 아닌 듯, 다큐인 듯 아닌 듯한 내용이 계속해서 흘러간다.

 

비루한 일상이 끊임없이 호출되지만, 인터넷이라는 환경은 이들을 무려 다른 행성에까지 도달하게 한다. 출근 후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헤드폰을 쓴 채 다양한 시대의 편지와 서체를 연구하던 한 연구원은 모두가 퇴근한 후에도 남아서 연구를 이어가다 마침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자신의 결론에 대해 확인받고자 챗GPT와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대화는 역시나 실패한다. ‘누군가와 수년간 다정하게 편지를 주고받았다면 적어도 그 당시에는 사랑했던 것 아니냐는 이 연구원의 자못 진지한 질문에 챗 GPT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은 좋은 것이라는 하나마나한 답을 내놓는다.

 

대화에 실패한 이 연구원은 어느덧 구글어스를 통해 화성으로 눈을 돌린다. 근접 촬영을 통해 이미지화된 화성의 돌 하나가 포착되고, 연구원은 이를 한참 바라보다 밖으로 나가 돌 하나를 주워 다시 돌아오더니 다정하게 이름을 붙인다. 개인을 탐구하고 이에 대해 소통하는 것은 이 지구상에서 불가능 한 일인 듯 이제 그 임무는 저 머나먼 우주 외딴 행성 위 돌멩이의 몫으로 돌려진 셈이다. 역사탐구연구소 연구원의 미션들은 과연 실패한 것일까? 아니다. 오늘은 비록 퇴근이지만 내일도 연구원들의 연구소 출근은 계속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