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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시몽과 끌레르, 그리고 너와 나를 수선하기: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본문

8면/연극비평

시몽과 끌레르, 그리고 너와 나를 수선하기: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Jen25 2024. 3. 12. 00:27

 

시몽과 끌레르, 그리고 너와 나를 수선하기: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김나볏 연극평론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는 심장이 뛴다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사람이 의식 없이 누워있을 때에도 심장은 속절없이 뛴다. 상상해보자. 여기 한 극장의 무대 위에 19세 청년 시몽의 심장이 뛰고 있다. 육체의 깊은 저 안쪽에서 밖으로 보내는 유일한 신호, 그러나 고요한 이 육체가 아직 작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다. 누워 있는 육체 속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을 우리는 함께 바라보는 중이다. , 계속해서 뛰는 심장을 이 젊은 육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봐야 할까, 아니면 그저 기계적인 박동음으로 치부하고 말아야 할까.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동명 소설을 원작자와 각색가 에마뉘엘 노블레가 함께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 소설은 앞서 맨부커 국제상 노미네이트, 오랑주 뒤 리브르상 등 전 세계 11개 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은 바 있다. 이 같은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연극작품은 19세 청년 시몽의 심장이 51세 여성 끌레르의 몸에 이식되는 24시간 과정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이 사실 새삼스럽지는 않다. ‘뇌사 상태의 육체를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삶과 죽음의 이 경계선 상에서, 의학적 판단은 이미 분명하고 명쾌하다. 의식이 없는 한 시몽은 죽은 자다. 문제는 누워 있는 자는 그저 말없이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처분의 대상이 된지도 모른 채 그저 육신을 작동시키고만 있다.

 

뛰는 심장과 남은 자들

 

진짜 문제는 어쩌면 남은 자들이다. 한없이 젊고 싱그러운 시몽의 육체가 심장의 박동에 의해 여전히 눈앞에 존재하고 있다. 남은 자들이 시몽을 죽은 자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다. 어쩌면 시몽 자신도 자신을 죽은 자로서 받아들이기 힘들지 모른다. 의식이 없지만 그래도 단언할 수 없다. 시몽이 직접 의사 표시를 한 바는 없으니까(!). 소설도 대체로 그러하지만, 연극은 특히 오롯이 이 같은 실존 상황에 주목한다. 긴박한 상황 속 그의 심장,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감정이 무대 위에서 집중 조명된다. 소설을 쓴 원작자가 이미 널리 인정받은 동명의 소설을 1인극의 희곡으로 각색하는 데 동의하고, 또 이 과정에 함께 참여하기까지 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 아닐까. 소설과는 또 다른 에너지가 무대라는 공간에서 응축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연극의 기저에 유유히 흐르고 있다.

소설 원작에서 시몽의 심장을 육신의 블랙박스에 비유한 것을 상기해보면, 극장이란 공간은 그 자체로 이 블랙박스의 현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시몽의 심장을 넘어서 주변인들의 심장, 관객의 심장까지 한데 모이는 공간이 바로 이곳 극장이다. 16명의 등장인물, 그리고 관객들이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에 선 시몽을 함께 둘러싸고 있다. 시몽까지 포함한 16명의 등장인물은 배우 1인이 연기한다. 이 같은 설정은 시몽의 심장이 이식되는 과정이 단순히 심장 공여자인 시몽과 수여자인 끌레르 사이의 일에 그치지 않음을 암시한다. 시몽과 끌레르를 넘어, 가족의 일이자 연인의 일이며, 수술실 안 의사들의 일이자 심장을 옮기는 이송자들의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함께하는 당신과 나의 일이다.

배우 1인은 이제 육신의 블랙박스를 파헤친다. 국립정동극장의 깊고 커다란 무대에는 테이블 하나만 덩그라니 놓여 있다. 극장 무대 가장 안쪽에 비스듬히 놓인 상부는 거대한 스크린으로도 활용된다. 극장의 시간은 시몽이 아직 살아 있던 때부터 시작된다. 고로 우리는 서핑을 하는 19세의 젊은 육체부터 함께 마주하게 된다.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오고 시몽과 친구들은 경외감과 환희 속에 살아 있음을 즐긴다. 이들과 함께 시몽의 심장도 쉴 새 없이 뛰고 있는 중이다. 시몽은 모르고 있지만 우리는 안다. 시몽 인생의 마지막 블랙박스가 새겨지는 순간이다. 커다란 스크린 속 생생한 파도는 계속해서 몰아치며 시몽과 관객을 압도한다.

그 다음은 비극의 시작이다.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던 파도는 이제 온 데 간 데 없고 서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자동차 사고, 응급상황, 그리고 꽉 막힌 도로를 뚫으면서 이뤄진 긴박한 이동 후 무대는 어느덧 수술실을 거치면서 긴 침묵과 어둠 속에 잠긴다. 스크린에는 어느덧 파도 대신 파형을 닮은 심전도 그래프만이 새겨진다. 그리고 카운트다운도 함께. 뇌사 판정이 이뤄지고 이제 시몽의 심장은 결정을 내려야할 대상이 되어버린다. 육신을 옮겨 다른 생명을 이어가는 숭고한 도구가 될지, 아니면 이대로 영영 풀리지 않을 블랙박스처럼 남겨질지 남겨진 이들이 감히 결정해야 할 순간이다.

 

누군가를 애도한다는 것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비극은 우리 삶속에서 때때로 벌어진다. 게다가 어떤 비극은 시몽의 경우처럼 통제할 수 없이 너무나 급작스럽고 가혹하게 벌어지고야 만다. 비극 앞에서 우리는 울부짖고 고통스러워하고 때로는 부정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비극은 그럴 틈도 주지 않은 채 더욱 가혹하게 우리를 몰아붙인다. 시몽의 남은 심장이 그러하다. 결정의 시간이 분초로 새겨진 채 다가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비극 앞에 선 사람들, 그리고 시몽을 위해 작가는 시몽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 애도의 과정을 아주 섬세하고 정교하게 그려낸다. 긴박한 순간임에도 어느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으며 세밀하고 빠르게 진심을 다해 훑어나간다. 배우 1인은 어찌 보면 작가로부터 중책을 부여받은 제사장과도 같다. 관객은 이 제사장의 인도에 따라 기꺼이 애도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16명에 대한 한 사람의 상상, 그리고 행간의 감정들에 대한 관객의 상상이 더해지며 이 텅 빈 공간을 꽉꽉 채워나간다. 시몽의 삶을 복원하고 애도하며 남은 자들을 함께 위로하는 과정이다. 1인의 배우는 이 제사장의 업무를 능숙하고도 섬세하게, 또 깊이 있게 운영해나가며 관객의 마음을 시몽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인도해나간다.

애도는 비단 수술실에서의 일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식 절차가 진행되는 가운데, 시몽의 삶은 계속해서 재생되고 애도하는 이들의 시각을 빌어 재구성된다. 심지어 심장이 이송되는 과정에서도 이 심장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더해지고, 이 과정 사이사이에도 시몽의 삶은 계속해서 아로새겨진다. 이 정교한 스펙트럼은 마치 시몽이 사랑했던 파도의 물방울처럼 무대를 수놓으며 관객을 적시기에 이른다. 손상규, 김신록, 김지현, 윤나무 등 4명의 배우가 각기 다른 날짜마다 무대에 올라 시몽과 그 주변인들의 심장 속 블랙박스를 풀어헤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서로 다른 애도의 방식이 각기 다른 파형을 만들어내며 무대에 애틋함과 감동을 더해나간다.

우란문화재단과 프로젝트그룹 일다의 공동기획으로 201912월 한국 초연된 이 작품은 2021, 2022년 재공연을 거쳐 다시 올해 2월과 3월에 걸쳐 관객을 만났다. 국립정동극장에서 진행되는 올해 공연은 프로젝트그룹일다와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가 함께했다. 민새롬 연출가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출이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의 의도에 더욱 귀 기울이게끔 한다.

시몽의 심장이 끌레르에게 마침내 성공적으로 이식되면서 극은 마무리된다. 다시금 연극의 제목을 떠올려본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살아있는 자는 시몽일까 아니면 끌레르일까. 그리고 수선된 이는 시몽일까 끌레르일까. 어쩌면 살아있는 자라 함은 시몽 주변의 남은 자들 모두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남은 자들의 마음을 수선하는 일에 동참하는 관객들까지 모두 다 살아있는 자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시몽의 심장에 새겨진 삶의 기록들과 감정들을 오롯이 이 살아있는 자들에게 전이되게 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진정한 애도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