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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벗는 남자: 극단 에게, <응원: Postscript> 본문

8면/연극비평

벗는 남자: 극단 에게, <응원: Postscript>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6. 28. 11:20

벗는 남자: 극단 에게, <응원: Postscript>

 

하은빈 드라마투르그

 

 

 

지난 4월 말에는 한 이십대 남자가 화제였다. 미술관 벽에 붙여둔 값비싼 바나나를 먹었다는 남자. 그 일이 생각만큼 화제가 되지 않자 출신 대학과 학과를 들먹이며 '지인을 통해' 언론사에 자신의 퍼포먼스를 알렸다는 남자. 그의 행위가 얼마나 대단한 예술적 의미를 가지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카메라를 의식하는 시선과 상황을 즐기려는 듯한 어색한 웃음, 바짝 매인 채 존재감을 과시하는 명품 브랜드의 넥타이, 그가 연출하고자 한 바와 그가 실제로 노출한 바 사이의 틈에서 덜렁이는 자의식을 보는 일은 피로하고 떨떠름했다.

 

그즈음 신림중앙시장에서 올라간 공연 <응원: Postscript>(이하 <응원>)은 내게 '바나나남'을 연상시켰다. 바나나남의 경우야 영상을 꺼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응원>을 보는 일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적잖이 고역이었다. 

 

가령 이런 것들. 덕지덕지 붙어는 있으나 접착력이 부족해 이내 둥둥 떠다닐 따름인 각종 컨셉들-이를테면 밀양 홍제사의 표충비와 체코 엘베강의 헝거스톤, '고통의 근원'이라는 뜻의 독일어 dorn과 원천세 3.3%를 붙여 만들었다는 혼성 아이돌 그룹명 '도른 3.3', 관객의 눈 앞으로 쏟아지는 한바가지의 물과 녹아내리는 옥상의 얼음 기둥 등등-은 대체 무슨 연관으로 한데 총출동한 것일까? 관객들에게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그러나 신림중앙시장의 곳곳에 방치된 폐기물들과 별반 구분되지 않는, <가오, 다시>라든가 <니코복코> 같은 그다지 웃기지 않은 언어유희를 시도하는 일련의 설치 작품들은 시종일관 흐르는 공연의 텍스트와 대관절 무슨 관계를 이루는 것일까? 

 

고약한 지점들은 차고 넘쳤지만, 그중에서도 곤욕스러웠던 것은 바로 이 공연의 핵심을 이루는 텍스트다. 한 중년 남자의 내면 풍경을 옮기는 그 독백은 작가이자 연출자 이명우의 낭독으로도 발화되고, 이따금 스피커를 통해 배우들의 음성으로도 송출된다. 그런데 그 장황하고 지리한 발화는 관객과 소통할 뜻은 없되 입을 다물 생각 또한 없이 70분간 일방적으로 이어져, 관객에게 그 어떤 유의미한 순간을 제시할 의지도 노력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관객 이동형 공연'이라는 안내에 따라 순순히 걷고 멈추며 텍스트를 들으려 애쓰던 관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 둘 발끝을 보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급기야 신림중앙시장 공간 구석구석에 느닷없이 지대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내 인내심이 결정적으로 바닥난 시점은 예술 하는 남성 특유의 (남근적) 자의식을 원치 않게 청취하거나 목격해야 했을 때다. 예컨대 공연의 어느 시점에서 관객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독백을 통해 나무의 구멍에 성기를 집어넣어 나무와 결합하는 성행위를 길게 들어야만 한다. 그것은 연출 이명우가 의자에 앉아 의자째로 뒷구르기를 반복하는 의아한 퍼포먼스를 선보인 직후의 일이다(젖혀진 의자의 바닥에는 '숙달된 전문가입니다. 따라하지 마세요!'라는 주의문이 붙어 있다. 이것은 여러모로 관객에게 충격을 가한 이 공연이 제공했던 유일한 경고문이다). 나무와의 기이한 성행위가 기술되는 동안 관객은 멀리서 헬멧을 쓴 채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 이 텍스트의 저자 이명우를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의심과 경악으로 휘둥그래 뜨이는 눈을 도무지 숨기기 어려워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옆 자리 여성 관객에게서도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일종의 '바바리맨'의 순간이 아닌가? 우리는 살면서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는가? 나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의 한편에는 미술관에 붙은 바나나를 히죽거리며 벗겨먹고는 그 사실이 응당 세상의 큰 주목을 요한다고 여기는 이십대 남자가 있으며 또다른 한편에는 나무의 구멍에 성기를 출입시키는 피투성이 성행위를 소상히 읊어대는 오십대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ᅠ

 

이 공연의 관객은 이러한 수모를 공연의 말미에 이르러 또 한번 겪어야 한다. '도른 3.3'의 데뷔 무대 직전, 이명우 연출이 (거의) 나신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신림중앙시장의 옥상의 어느 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몸을 씻으며 몸에 그려진 그림들을 지운다. 나는 느닷없는 중년 남성의 나체 출현에 놀라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최소한 속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에, 그래서 그의 고추를 보지 않은 사실에 그나마 감사해야 할까? 그러나 내게 위안을 준 것은 차라리 안드레아 롱 추의 문장들이었다.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에서 약 10분 가량 지속되는 기다랗고 긴 막대기의 기립을 "거대하고 새하얀 발기“에 빗댔던, 그 시간이 "영원"과도 같았다고 일갈했던. 

 

이 공연을 이루는 텍스트 속에는 유의미한 타인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 공연에는 한 중년 남성의 우울하고 자기중심적인 독백을 구현하기 위해 너무 많은 타인들이 동원되었다. 공연 준비 기간을 단지 3-4분 가량의 '도른 3.3 데뷔 무대'만을 위해 보냈을 배우들의 노고에 도무지 어떻게 유감의 마음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들의 데뷔 무대-이 작품의 종료와 함께 다시는 공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은퇴 무대이기도 한-를 한편으로는 참담한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연대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관객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응원'해야 하는지, 응원이 있으면 이 정체불명의 작품이 다른 무엇으로 변태할지 내가 알았다면 그 말들을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들을 찾을 수 없었다.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 없었고, 이 작품의 안으로 도무지 진입할 수 없었다. 이를 나의 실패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시당초 이 작품에 내부라는 것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이 작품에 외부가 없었다는 것은 잘 알겠다. 시선을 받는 이의 수치를 잘 모르는 듯했기 때문이다. 

 

<응원>은 관객을 제 안으로 들이려 하기보다는 관객을 향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발사하는 작품이었다. 불필요한 성행위의 묘사나 나체 퍼포먼스를 제외하고도 말이다. 관객들은 나름의 논리와 정합성을 가지지도, 구조화나 의미화와 같은 일련의 소화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말들을 내내 뒤집어써야 했다. 나는 그런 것을 일종의 배설이라고, 혹은 사정이라고 여긴다. 내게 있는 말이라곤 예술은 배설과 동의어가 아니고 나는 변기가 아니며 남자들은 아무쪼록 고추 간수에 힘써야 한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