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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헤어짐을 상연하는 애인들에게 : 극단 애인, <장애:제3의 언어로 말하다_선택> 본문
헤어짐을 상연하는 애인들에게: 극단 애인,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_선택>
드라마투르그 하은빈
극단 ‘애인’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은 십 년 전의 일이다. 이들이 올린 <고도를 기다리며>가 어떤 사건처럼 나를 압도했다. 이후로 멀리서나마 종종 보았다. 2019년에는 두산아트센터에서 올라간 <인정투쟁: 예술가 편>에 대해 아쉬운 소리를 남기기도 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장애예술’에 나름 깐깐하게 굴고 싶었던 모양이다. 본전도 못 찾았다. 이듬해 이들의 <1인 무대>를 보고는 비평이랄 것을 처음 시작했다. 머리를 쥐어뜯고 벽에 머리를 박으며 썼다. 지면이 생기고 고료가 나와서가 아니라 좋은 걸 좋다고 잘 말하고 싶었다. 지금도 같은 마음으로 쓰고 있다.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_선택>(이하 <선택>)으로 곧장 질러오지 않고 애인과의 기억을 돌아본 것은 애인에게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애인의 연습실에서 공연 <선택>을 올리며, 김지수 대표는 관객에게 애인의 공연을 관람했던 경험을 묻는다. 관객이 기억을 톺아 그 어떤 공연을 꺼내놓아도 지수는 해당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어제 일인 양 줄줄 꺼내놓는다. 빙 둘러앉은 관객들이 등진 연습실 벽에는 그간 애인이 올려온 공연들의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어디를 보고 발화해도 애인의 시간과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본 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2007년 창단 이후 지금까지 애인이 올린 공연은 스물아홉 편에 달한다. 16년이라는 시간동안 애인은 묵묵하고 숙련된 마라토너처럼 꾸준히 창작을 지속해 왔다. 그러나 이 공연, <선택>의 막을 여는 강희철 배우의 영상은 극단 애인의 많은 것들이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상에서는 활동보조 시간 연장 심사를 받는 희철의 모습이 보여진다. 그는 전과 달리 확연히 약해졌고, 생활의 대부분을 타인의 보조를 통해서만 할 수 있게 되었다. 관객들은 지금 이 공간에 없는 희철의 부재를 느끼며 스크린을 한동안 바라본다.
달라진 것은 비단 희철만이 아니다. 애인의 다른 단원들 모두 각자의 흐름 속에서 크고작은 변화를 통과하는 중이다. 누군가는 외부 작업을 원하고, 누군가는 극단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누군가는 지원사업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원들이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지수는 애인을 해체하자는 결정을 내린다. 지수의 이 결정은 파문처럼 둥글게 퍼져나가 단원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펼쳐낸다. 예슬과 보람, 지성과 우람, 주희와 희철, 그리고 다시 지수… 이렇듯 애인은 자신들의 역사와 기억이 담긴 공간에서 극단 애인의 해체를, 서로와의 헤어짐을 상연한다.
보람과 지성이 연습실 밖에서 춤추던 장면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각자가 배우나 퍼포머로서 작품에 어떻게 임하는지 열띠게 토론하던 그들은, 일순 연습실 문밖으로 박차고 나가 거리에서 움직인다. 자신들의 오랜 출근길이자 퇴근길에서, 관객들이 이들의 몸을 미처 다 볼 수 없는 장소에서, ‘민들레멀티구제샾’의 불꺼진 점포 앞에서, ‘먹자풍천민물장어’에서 밥을 먹는 손님들의 흘깃거리는 시선 속에서. 관객은 활짝 열린 문과, 문밖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그들의 몸짓에서 지성과 보람의 선택을 짐작한다. 더 이상 애인의 연습실과 무대가 아닌 곳에서도, 그들을 가장 호의적으로 바라보아줄 관객이 없는 곳에서도, 이들은 앞으로 계속해서 배우로서 살아갈 것이다. 무대가 아닌 곳을 무대로 만들면서. 시선을—혹은 시선의 부재를—기꺼이 감당하면서.
극단의 행정을 담당해온 ‘주희쌤’이 단원 모두에게 내렸던 불호령도 강렬했다. 주희는 극단 구성원 모두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들이민다. 많은 이들이 애인의 폐업을 선택한다. 그들 각각의 대답에서 나는 매번 작은 충격을 받는다. 대답 자체보다도 그 대답이 즉각적인 것에서, 목소리가 차분하고 단호한 것에서, 차돌처럼 작고 딱딱한 종류의 대답이라는 점에서 오는 충격이다. 그것이 내게 상처를 남긴다. 각자의 선택이 아주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굳을 때까지, 여러 목소리가 오랜 시간 내벽 여기저기를 할퀴며 소란하게 굴러다녔으리라는 사실이 주는 상처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이 상처받았으리라는 짐작이 주는 상처, 애인의 헤어짐을 지켜보는 관객이 응당 함께 하고 경험해야만 하는 상처다.
공연은 단원 각자의 이야기를 돌아,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려 힘쓰는 희철과 지수에게로 되돌아온다. 지수는 공연 중 뒤늦게 무대로 입장한 희철에게 스포츠 밴드를 건네며 말한다. “운동합시다.” 둘은 팽팽한 장력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당기거나 서로에게 끌려 주며 한동안 대화한다. 비슷한 종류의 장애를 가진 두 사람은 이제 노화해가는 몸에 적응해야 하는, 같은 정도의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것들을 서로 견주고 포기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어느 순간 배우들을 연결하는 끈의 개수가 하나 둘 늘어난다. 그 느슨한 줄다리기에 예슬과 보람, 우람, 지성, 주희도 합류한다. 끈들은 매듭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향해 교차해 있다. 사방팔방으로 뻗은 라텍스 끈이, 손과 몸의 당기고 미는 움직임에 따라 허공에서 한동안 끄덕끄덕 움직인다.
그 형상은 극단 애인의 상황을 닮았다. 누군가가 당기는 만큼 누군가는 힘을 주고 버텨야 한다. 매듭 덕에 굳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상 서로에게 매여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어떤 이가 말도 없이 놓아버리면 팽팽해졌던 끈은 누군가를 향해 가파르게 날아가 상처를 입히고 말 것이다. 무엇이 가능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가 쥔 끈을 당기고 버티며 애인의 구성원들은 오랫동안 서로에게 물어왔을 것이다.
지수가 제안한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 동시에 놓아볼까요?” 지수의 신호에 따라 그들은 서로를 연결한 끈을 동시에 놓는다. 그들이 이룬 원 안 허공 어딘가에서 끈이 파르르 몸부림치며 떨어진다. 무언가를 축하하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폭죽처럼. 긴 마라톤을 달려온 주자들에 의해 끊어지는 결승선 테이프처럼.
그들은 잘 알면서 끈을 놓았을 것이다. 결코 이전과 같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서로를 연결하는 끈 없이도 각자의 삶은 계속될 것임을, 그것이 서로를 사랑하기를 그만둔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지극히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으레 그러듯이 공들여 마침표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 마지막을 애석해하기에는 커튼콜이 너무 짧다고, 늦된 관객은 박수를 치며 생각한다. 애인이 있어서 정말 좋았다고, 어디서든 응원한다고, 더 일찍 더 많이 더 잘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므로, 커튼콜에서 끝까지 앉아 박수를 치는 관객처럼 미련 어린 글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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