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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다시 포개지지 않을 무구하고 연약한 약속들: AMC, <단명소녀 투쟁기> 본문
다시 포개지지 않을 무구하고 연약한 약속들
: AMC, <단명소녀 투쟁기>
드라마투르그 하은빈
<단명소녀 투쟁기>(이하 ‘단명기’)의 연출 우지안은 연습에 들어가기 전 미용실에 갔다가 준비 중인 연극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이 연극에 대해서. 무당 ‘북두’의 점집을 찾은 열아홉 살 소녀 ‘구수정’은 입시 결과를 물으러 왔다가 날벼락 같은 예언을 듣는다. “야, 너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구수정은 반문한다. “…싫다면요?” 죽음보다 빠르게 움직이라는 조언에 따라 구수정은 남으로 남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들은 미용사는 말한다. “그러니까 믿음에 관한 이야기인 거네요.” “네?” “죽는다는 예언을 믿었기 때문에 시작되는 이야기인 거잖아요.”
우지안은 예쁘게 자르고 염색한 머리를 이고 그의 말을 생각하며 미용실을 나선다. 그리고는 멋진 보랏빛이었던 그의 커트 머리가 지저분한 ‘송강호 머리’가 될 때까지, 우당탕탕 정도의 말로는 옮겨지지 않는 우여곡절 속에서 공연을 만든다. 나는 지금 이 글이 공연을 본 이의 입장이 아니라 공연을 만든 이들 가운데 하나의 입장에서 쓰이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중이다. 만든 사람의 낡은 눈과 좁은 마음, 치우친 애정이 그대로 글자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실로 <단명기>는 믿음에 관한 서사다. 그 믿음은 삶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믿음이다. “싫다면요?”라는 수정의 대꾸는 돌연한 죽음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를 묻는 말이다. 그것은 삶을 갈망하는 이의 태도라기보다는 임박해온 죽음을 언제나 의식해온 이의 반응에 가깝다. 그리고 구수정은, 북극성처럼 단단히 고정된 그 믿음을 부인하거나 덮지 않았다. 구수정은 그 믿음의 방향으로 자신을 한껏 끌어당겼다. 그러자 구수정의 꿈이 죽음을 중심 삼아 그 반대쪽으로 풍선처럼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그러므로 극 전체를 아우르는 힘이 있다면 장력이다. 파열되기를, 찢어지기를, 펑 터지기를 기다리며 가팔라지는 긴장이다. 무대 정중앙에 색색의 방석으로 조립된 둥근 바닥은 그러한 구수정의 꿈의 세계다. 무대 안에 세워진 또 다른 무대이자, “한 뼘짜리 우주”, “영원한 찰나”, “가장 강인한 약점”인 수정의 마음이다.
무대라는 일시적인 허구의 세계 안에 이중으로 또 다른 세계를 짓는 것, 그 세계의 질서를 손수 허물며 노는 것은 우지안이 그간 자주 사용한 연출 방식이다. 예컨대 <2020 메갈리아의 딸들>의 ‘메갈년’들은 남근상을 해체하여 경계를 짓고, 극의 말미에서 그 경계를 다시 부수었다.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의 ‘우루’들은 무대 중앙의 붉은 모래섬을 흩뜨리고 훼손하며 무대에 흡사 살해 현장의 핏자국을 연상시키는 잔해를 남겼다. 그러나 앞선 작품들이 그 질서의 체계를 교란하고 난입하고 동요시키려는 힘으로 꿈틀거린다면, <단명기>는 그 질서의 심장으로 깊이 파고들기를 선택한다.
살려고 남쪽으로 가던 ‘수정’은, 죽으려고 북쪽으로 가는 ‘이안’을 만나 나란히 저승으로 향한다. 살고자/죽고자 하는 각각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명부에 적힌 인물/괴물들을 죽여야만 한다. 수정과 이안의 명부에 적힌 이들의 이름과 얼굴은 같다. 삶을 타인의 추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악사, 사람들의 자리를 정하고 통제하려 드는 청소부, 빽빽한 눈으로 포위해오며 그들을 응시하는 ‘눈 인간’, 수정의 가장 귀한 것을 갈취하는 동시에 수정을 죽음에서 구하기도 하는 ‘모기 인간’… 이것들은 삶을 곤욕스럽게 만드는 여러 고통의 얼굴들이기도 하다. 때로는 얼떨결에, 때로는 유희하면서 벌어지던 ‘죽이기’는 점차 실체적이고 잔혹한 ‘살인 행위’로 구체화된다.
수정과 이안은 점차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에 대한 서로 다른 믿음으로 다투게 되고, 급기야는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눈다. 이안은 ‘희希’라는 이름의 긴 칼을, 수정은 ‘망望’이라는 이름의 짧은 칼을. 스스로를 방어하며 바닥으로 고꾸라진 수정이 아니라 긴 칼을 힘차게 휘두른 이안이 역으로 치명상을 입는 것은, 베는 사람과 베이는 사람이 결국 같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서로 다른 방향을 겨눈 두 칼의 뜻이 서로 같듯이, 사실 수정과 이안은 둘로 분열된 한 사람이다.
저승의 심장부까지 도달한 이 이야기가 어느 순간 죽음의 반대 방향으로, 삶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은 이안의 죽음이 임박한 시점부터다. 그때부터 수정을 추동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이안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이 된다. 저승의 가장 깊은 곳에서 수정을 다시 마주친 ‘모기 인간’들은 이안을 살려낼 유일한 방법을 귀띔해준다. 그 방법이란 저승에 불을 지르는 일이다. 수정이 죽인 얼굴들을 모조리 태워 저승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다시 말해, ‘죽음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수정의 견고한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절실히 바라기 위해서는 절실히 믿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정은 ‘죽게 되리라’는 믿음에서 ‘죽음을 죽일 수 있다’는 믿음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이전의 믿음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건너온 다리에 불을 지른다. 저승 이곳저곳에 불이 붙고, 고르게 붙박여 있던 바닥의 방석들이 무질서하게 떨어져 흩어진다. 저승 신은 타오르는 저승을 망연히 바라보며 수정의 시도를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 망치게 되는” 것이라고 절하한다. 그러나 수정은 저승의 잔해를 “최선을 다했기에 남은 흔적”이라고 바꾸어 말한다. 수정이 쥔 이안의 칼이, 이안을 살리려는 날선 희망이 저승을 붕괴시킨다.
팽창했던 세계가 빠르게 수축하고, 수정과 이안은 서로를 마주 본다. 이 순간은 공연 전체를 통틀어 수정과 이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이라는 점을 짚어야겠다. 사실 이안은 극 내내 줄곧 무대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오로지 목소리로만 이 극 안에서 움직이고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영 헤어져야만 하는 꿈속에서, 비로소 둘은 몸과 몸으로, 시선과 시선으로 만난다. 수정은 이안에게 나직하고 다정하게 말한다. “우리 다시 만날 거야.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그것은 이안이 극 내내 수정에게 내밀었던 약속이다. 그 약속을 이번에는 수정이 이안에게 건넨다.
나는 이 장면에서 번번이 새로이 울고 말았다. 불가능한 약속이어서도, 너무 무구하고 연약한 약속이어서도 아니다. 그런 실낱같은 약속만이 우리를 평생 살린다는 것을, 다시 포개지지 않을 무구하고 연약한 약속들만이 우리를 기어이 지속시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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