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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잠들지 않는 극장이 기다리며 꾸는 꿈 본문
잠들지 않는 극장이 기다리며 꾸는 꿈
: 김은한, <멀리서 응원하고 극장을 찾지 않는 사람들>
드라마투르그 하은빈
지난 여름 관람한 공연 <멀리서 응원하고 극장을 찾지 않는 사람들>은 긴긴 수수께끼 같았다. 김은한이 곳곳에 심어놓은 위트에 속절없이 터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미로처럼 얽혀있는 이 공연의 길을 어리둥절해하며 지나왔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동안 이따금 미처 다 가보지 못한 그 미로의 길들을 밟아보았다. 막다른 길에 놓인 함정 같은 슬픔을 들여다보다가 그 바닥을 가늠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그 자유롭고 정처 없는 오해에 관해 쓴다.
공연은 매우 길고 상세한 사전 안내로 시작된다. 아니 사실은 시작되지 않는다. 친절하다 못해 장황한 안내와 그에 따라붙는 은한의 온갖 잡담으로 시작은 미뤄진다. 소화기의 빡빡한 핀을 뽑을 때 동원되는 기합 소리, 비상 상황 발생 시 요구되는 모순적인 대피속도, 음식물 섭취 및 스마트폰 사용 자제의 구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는 연극인으로서의 호들갑, 한 시간가량의 공연을 편안하게 관람하기 위한 ‘핏하고 코지한’ 자세들, 비교적 근래의 극장 미스테리로서, 공연의 클라이막스에서 적막을 깨며 ‘텅-’ 하고 울려퍼지는 핸드폰 떨어지는 소리…
안내 중 간간이 또 다른 은한의 의견이, 쩔쩔매는 은한의 우려가 끼어들지만(“너무 길어…”) 안내자 은한은 변죽 울리는 일을 좀체 그만둘 생각이 없다(“아니 안내는 중요하니까~”). 분열한 은한(들)의 옥신각신이 이어지면서 이 기나긴 안내는 의도된 지연이었음이 드러난다. 하나의 몸 밖에 없는 1인극이므로, 다투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저 이 하나의 몸을 양옆으로 트는 것과 연기의 변화만으로 구현된다. 은한(들)은 이 사실을 구태여 숨기지조차 않는다. “그냥 한 사람이 두 사람인 척 하는 거잖아! 그냥 이렇게 이렇게 방향만 바꾸는 거잖아! 우리 연습도 진짜 많이 했잖아! (몸을 격렬하게 양옆으로 뒤튼다)”
이 다툼을 통해 밝혀지는 그(들)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매력적인 제목으로 사람들을 낚은 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재워서 보내기. 질려버린 관객들이 영원히 극장을 찾지 않게 하기. 왜? 극장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곳이고 “실패하는 사람들이 또 실패하는 장소”니까. 그 상처와 실패가 극장에 있는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니까. 이곳의 어느 구석도 그 고통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으므로 공연은 중단되어야 하고 극장은 폐업하는 편이 좋다.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앞서의 끝없는 안내 리스트는 어쩌면 극장의 존재론적 위험을 경고하는, 면밀하고 정교하게 쓰인 트리거 워닝일 테다.
그러나 이 테제, 사람들은 객석을 떠나야 하며 극장은 영원히 잠들어야 한다는 이 입장은 은한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기도 하다. 극작부터 연출, 연기까지 모두 홀로 해내는 1인 프로덕션으로서 김은한 그 자체가 이미 움직이고 이동하는 작은 극장이기 때문이다. 그의 고통은 바로 이 지점, 그 자신이 곧 극장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가까운 이들이 세상을 떠났던 시점에 활동을 시작했다는 김은한은 말하자면 슬퍼하다가 급기야 극장이 되어버리고 만 자다. 이 극장에 오르는 모든 세계는, 이야기는, 장면들은 직간접적으로 은한의 내면을 반영한다. 그의 사랑과 슬픔으로 지어진 이 극장에서는 언제나 상실이 발생하고 슬픔이 상연된다.
관객은 은한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어떤 환영을 본다. 그의 친구가 아주 멀리서부터 이 극장을 찾아오는 환영이다. 은한은 친구를 위해 공연을 시작하지 않고 기다린다. 5분도, 10분도, 20분도, 30분도, 심지어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도 기다린다. 급기야 그는 도중에 공연을 중단하고 극장의 문을 열어 누가 문밖에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기까지 한다. 긴 적막이 흐르는 동안 은한은 어둡고 좁은 문밖을, 관객은 은한의 망연하고 쓸쓸한 등을 바라볼 따름이다.
환영은 계속된다. 은한이 그토록 기다렸던 친구가 마침내 도착한다. 친구의 얼굴은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반면, 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은한의 얼굴은 기쁨과 슬픔과 그리움으로 일렁인다. 보고 싶었다고, 네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고 울먹이는 은한에게 친구는 느리게 말한다. “극장에서 나를 추모하지 않았으면 해. 극장에서 너를 위로하고 그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건 그냥 네가 갖고 있었으면 좋겠어.” 동요하고 흔들리는 은한과 달리 그는 차분하고 단호한 기색이다.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듯한 음성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는 태도를 지녔다.
그러나 그 환영 속 친구의 배역 역시 사실은 은한의 몫이다. 결국은 한 사람이 둘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고, 몸의 방향과 자리를 바꾸어가며 이어가는 혼잣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마주함의 사건이 기실 가상의 사건이라는 것은 혹독하리만큼 명료하다. 그러나 그 명료함이 바로 이 장면에 복잡한 여러 겹을 발생시킨다. 이 만남은 그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사적인 풍경인 동시에 지금 여기에서 관객 앞에 공연의 한 장면으로서 재현되고 발화되는 공적인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추모의 중단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추모가 발생한다. 추모의 불가함을 더듬으면서 기어이 추모가 지속된다.
이는 어쩌면 가혹한 진실을 더욱 부각하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추모를 금지할 그 친구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은한이 아무리 공연의 시작을 미루고 눙친다고 해도 그를 위한 객석은 영영 비어있으리라는 진실. 그러나 그 진실을 뒤집으면, 이 장면은 은한이라는 극장이 어떤 관객(들)을 영원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표시하는 갈피가 되기도 한다. 은한은 그 자체로 곧 극장이므로, 이 극장에 또다른 세계가 들어오고 새로운 공연이 펼쳐질 터이므로, 관객이 도착하지 않은 채 한 공연이 끝난다고 해도 그의 기다림까지 끝나는 것은 아닐 테다. 그렇다면 김은한이라는 극장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공간으로서 아직/언제나 가능한 장소가 된다.
공연의 말미에서 은한은, 몇 년 전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 썼던 소설을 낭독한다. 광대조차 부활하지 않는 어느 밤, 세계의 끝에 도착한 여행자 ‘알제’가 저 세계로 넘어가는 장막을 지나 죽은 연인을 돌려달라고 청하는 이야기다. 은한의 낭독이 이루어지는 동안 소설 속의 장막이 우리의 머리 위에도 드리운다. 극장인 곳과 극장 아닌 곳을, 무대와 객석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엷고 희미한 장막이다. 그 장막은 관객의 상상 속에서 펄럭이며 부재의 감각을 고통스럽게 각인하는 한편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틈을 설핏설핏 드러낸다. 그 틈의 풍경은 누군가의 꿈을 닮았다. 연인의 머리를 안고 잠든 알제가 꾸는 꿈. 김은한이라는 잠들지 않는 극장이 기다리며 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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