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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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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면/연극비평

웃어, 세월호 연극에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5. 5. 00:12

웃어, 세월호 연극에* : 연극 <툭> 리뷰

*뮤지션 이랑의 노래 <웃어, 유머에>에서 제목을 차용하였다. 이 글 역시 같은 노래를 들으며 썼다.

 

하은빈 연극평론가

 

 

 

세월호라는 주제 아래 올려지는 연극을 보며 이따금 웃는다. 연극 <툭>에서도 그랬다. ‘서천꽃밭’ 개원 기념 ‘힐링강연’에 대해서 무덤덤한 얼굴로 “별로…” 라며 찬물을 끼얹는 지수가 귀여워서, 엉뚱한 유령을 아내의 영혼으로 착각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기영이 가여워서. 대개 나 혼자 웃고 있었고 그때마다 객석의 침묵이 의식되었지만 나오는 웃음을 구태여 참지는 않았다. 

알고 있다. 어떤 소재 앞에서 때로 웃음은 무례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을. 더군다나 감염병 시대 이래로 ‘타인을 나로부터 보호’하게끔 제어된 몸짓과 소리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게도 눈치라는 것이 있으므로… 웃음이 터질 때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웃지 못하고 있는 누군가의 마음을, 다른 이에게 상처가 될까 봐 웃음을 누르는 배려의 마음을 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감염병의 시대에 모두들 다급히 체화한 ‘거리두기’의 예의와 윤리의 선을 나 혼자 지그시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덮어놓고 웃으라고 만들어진 듯한 장면들에서도 자주 홀로 웃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면 멋쩍고 무안했다. 하하학, 하는 내 웃음소리가 눈치 없이 크고 힘찬 것 같아서 조금은 외로웠다. 그러나 만일 나와 같은 이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웃고 싶으면 웃어도 된다고. 세계가 나날이 절망스러워질수록 우리에겐 삶과 희망 앞에서 크게 웃을 용기가 필요하다고. 

 

*

 

있는 것이라고는 납골당뿐인 황량한 외곽의 소도시 ‘무영’. 납골당 바로 옆에 위치한 식물원에서는 새로 조성한 관광사업 ‘서천꽃밭’의 개원 준비가 한창이다. 명목상으로 서천꽃밭은 할락궁이 설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추모공간이지만, 실은 납골당을 방문하는 추모객들을 유치하려는 식물원의 야심찬 관광사업이다. 

산 자들은 대체로 이곳에서 여유가 없다. 서천꽃밭 프로젝트를 이끄느라 여념이 없는 호준과 소희는 개원을 앞두고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그들에게 죽은 자들이란 추모와 애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당장의 프로젝트 성패를 위한 아이템으로서 더 주요하다. 젊은 시절 ‘산전수전 다 겪은’ 무뚝뚝한 인부 선재는 마치 조금이라도 쉬면 죽는다는 듯이, 호준과 소희의 무리한 요구에도 군말 없이 맹렬하게 일한다. 한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남아 식물원의 알바생이 된 지수는 웃음기 한 톨 없는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좀처럼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이 없고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으며 유령처럼 걸어 다닐 따름이다. 그러다 천장에서 작업하던 선재가 실수로 ‘툭’ 하고 무언가를 떨어뜨렸을 때 지수는 눈에 띄게 소스라치며 무너진다. 

이 중에서 가장 발랄하고 활기 있는 이는 도리어 죽은 자인 민주다. 하늘의 서천꽃밭에서 죽음을 거슬러 이곳으로 떨어진 민주는 선재의 일을 방해하고 꽃들을 헤집으며 산 자들의 일을 그르치고 훼방 놓으려 한다. 그러다 ‘기가 허해’ 자신을 알아보게 된 지수에게 민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승의 진짜 서천꽃밭에서 꽃봉우리들이 툭툭 꽃을 틔워내며 흔들리는 진풍경을 보았다고. 그곳에서 뼈살이꽃, 피살이꽃, 살살이꽃을 훔쳐 자신의 몸이 있는 이곳 납골당으로 떨어졌다고. 그러나 민주라는 이름 말고는 이전의 삶에 관한 기억을 모조리 잊고 말았다고. 지수는 민주가 자신의 몸을 찾아 환생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한다. 단서는 오로지 민주에게 교정기가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지난날의 슬픔과 죄책감에 잠겨있던 지수는 민주와 움직이고 대화하면서 점차 이전의 활기를 되찾아간다. 학창 시절 강당 천장이 무너지는 사고로 친구들을 잃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그간 꺼내지 못했던 울음을 펑펑 쏟아내고, 민주가 불쑥 내민 저승의 웃음꽃 향기에 학 하고 웃었다가 화들짝 놀란다. 다른 일을 하는 척 근무지를 벗어나서는 민주와 식물원을 산책하고, 납골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등학교 동기를 찾아가 먼저 꽃다발을 내밀고 밖에서 만나자며 자신의 연락처를 건넨다. 

드디어 민주와 지수는 무연고자 유골함이 보관된 장소의 위치를 알아내 납골당 지하로 숨어들어간다. 무거운 유골함을 하나씩 집어 들어 흔들어보지만 아직까지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모르는 이의 유골함을 하나씩 하나씩 제자리에 놓아둘 때마다 민주와 지수의 조바심과 절망감은 점점 더 커진다. 

마침내 남은 것은 마지막 유골함. 민주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지수가 유골함을 높이 쳐든다. 있는 힘껏 흔들자, 거짓말처럼 ‘툭’ 하고 소리가 난다. 화장터의 불길에 녹지 않은 민주의 교정기가 도기에 부딪치는 소리다. 한때 지수에게 죽음을 환기하는 소리였던 ‘툭’ 소리가 민주의 유골함 안에서 희망찬 삶의 소리로 변하여 맑은 방울 소리처럼 쨍그랑 울려 퍼진다. 

 

*

 

지지난 호에 다룬 공연 <조각난 뼈를 가진 여자와 어느 물리치료사>는 ‘맑고 청아한’ 뼈 부러지는 소리를 통해 불가능한 사랑의 세계를 열어보이는 공연이었다. 그렇다면 <툭>은, 내내 살고 싶어하지 않던 지수가 제힘으로 죽음의 소리를 삶의 소리로 바꾸어내는 공연이다. 작은 물건이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도 속절없이 무너지던 지수는, 이제 친구에게 몸을 되돌려주기 위해 또 다른 ‘툭’ 소리를 직접 찾아 나선다. 당장이라도 사라지고 싶어하는 것처럼 벽에 바짝 붙어 살금살금 걷던 지수가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절박하게 또 힘차게 유골함을 흔드는 것을 보는 순간 앞에서 기뻐하고 웃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세월호 연극을 보며 과감히 기뻐하고 또 웃는 일은, 특정한 정서를 통해서만—이를테면 슬픔과 절망, 분노와 비관, 숙연함을 통해서만—세월호를 애도해야만 할 것 같은 어려움과 두려움에 저항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연극 <툭>이 보여준 많은 장면에서, 웃음을 향해 틔워놓았다고 여겨진 많은 순간에서 비슷한 종류의 믿음을 혹은 용기를 보았다. 웃을 용기. 살아낼 용기. 절망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다시금 삶을 향해 거슬러 오를 용기. 

극 후반으로 갈수록 객석의 훌쩍이는 소리 사이로 조금씩 웃음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모두의 내면에서 치열한 갈등과 고민이, 협상과 대결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이따금 웃음소리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닐 때가 있었다. 객석의 웃음에 힘입어 공연이 몇 발짝 더 앞으로 나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민주가 서천꽃밭에서 보고 들었다는 그 소리를, 하늘의 꽃밭에서 돋아난 꽃망울이 새로운 생을 향해 툭툭 피어났다는 소리를 함께 듣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