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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고요하고 순정한 파열 : 공연 <조각난 뼈를 가진 여자와 어느 물리치료사> 본문
고요하고 순정한 파열
: 공연 <조각난 뼈를 가진 여자와 어느 물리치료사>
하은빈
연극평론가
부서진 이들은 대개 이전과는 다른 이들이 된다. 채워지지 않는 틈새로 낯선 삶이 들어오므로, 뜯겨진 자리에서 돋아난 다리를 지나 타인의 세계로 넘어가므로. 상처가 우리를 닫혀있게 두지 않는 탓에 부러진 것들은 좀체 붙지 않는다. 고통이 우리를 모르는 세계로 자꾸만 데려가는 탓에 앓는 이들은 좀처럼 낫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부서지는 것은 사랑의 불가피한 요건이다. 불완전한 이들만이 바깥에 매료되고, 결여가 사무치는 이들만이 자기 안으로 타자를 들인다. 대개의 이야기가 중요한 무언가를 부수며 시작되는 것은 그래서다. 쪼개지지 않으면 어떤 바깥도 열리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선 누구도 낯선 세계에 당도하지 않는다.
이 공연의 경우 부서지는 것은 뼈다. 어느 배우의 뼈가 부러지고, 이 골절로 인해 그녀는 무대가 아니라 물리치료실로 불시착한다. 이 공연 <조각난 뼈를 가진 여자와 어느 물리치료사>(이하 <조각뼈>)는 이 골절을 척골과 요골두의 ‘사랑’의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이 공연이 부러지면서 시작되는 세계, 다시는 이전의 모양으로 붙지 않을 몸, 우리를 모르는 나라로 데려다 놓을 파열에 관한 공연이라는 의미다.
각자의 세계에서 제각기 궤적으로 살아온 배우와 물리치료사. 배우의 부러진 요골두를 붙이기 위해서 둘은 물리치료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 시간의 목적은 되돌아가는 것, 재활하고 회복하는 것, 조각난 것을 도로 붙이는 것. 한 몸은 힘을 가하고 한 몸은 힘을 견디며, 두 몸은 실로 집요하고 치열하게 밀착한다. 계절이 지나간다. 뼈는 붙지 않는다. 치료가 속절없이 길어진다.
어느 날 그녀는 유난히도 막대한 통증에 몸부림친다. 회복을 위해—고통을 줄이기 위해—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물리치료사는 지금 이 순간 그녀의 고통을 완화하는 이가 아니라 끔찍한 고통을 가하는 자다. 자신을 해하는 몸에 대한 살의가 끓어오른다. 배우는 자기도 모르게 있는 힘껏 치료사를 걷어찬다.
물리치료사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간다. 일순 청량한 소리가 난다. 두 사람 모두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소리, 뼈 부러지는 소리, 물리치료사의 요골두가 다섯 조각으로 쪼개지는 소리.
2020년에 오른 공연 <추락1>에서는 다음의 대사가 있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걸 너도 똑같이 느꼈으면 좋겠어. 나는 너네 누나가 헬기 사고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더 짧게 말해서 이것은 다음의 말과도 같다. “당신은 내가 될 수 없다. 내가 당신이 될 수 없듯이. 우리가 정확히 같은 통증을 느낄 수 없는 이상은.”
그런데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은 의미로 뒤집어진다. 고통을 통해서라면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몸을 찢고 나와 타인에게 도달한다. 우리가 같은 통증을 가진다는 것만이 사랑의 불가능한 바람을, 나를 떠나 서로에게 진정으로 도착하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킨다. 그런 점에서 정확히 같은 상처를 갖게 된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이다.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사랑의 사건이다.
그리고 <조각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 누군가의 고통을 경감하려 한, 그러나 그 고통을 전연 모르던 이가 같은 손상을 입는 일. 물리치료사는 강력한 통증을 통해 이전에는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생생한 고통을 감각한다. 그 파열의 소리가 “맑고 청아한” 것은 이전에 모르던 세계가 열리는 소리인 탓이다.
그 세계는 다섯 조각으로 부서진 뼛조각들과, 그 조각뼈들이 열어젖히는 미지의 세계다. 잃어버린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 만나지 못할 뼈들이 서로 만나 사랑을 하는 세계. 서로를 모르던 배우와 물리치료사가 조우하여 서로의 알지 못했던 고통을 더듬고 위로하는 세계. 그곳은 부서진 상태로만 머물 수 있는 나라, 손상된 존재들만이 진입하게 되는 임시의 나라다. 그들은 회복되는 순간 잊힐 나라의 주민들이다.
그 틈새의 세계에서, <조각뼈>를 만드는 배우들은 공연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움직임을 중단한다. 이들은 한참을 멈춰서서 그저 사과를 먹는 일에만 골몰한다. 무대를 서성이는 것은 오로지 단단한 것과 단단한 것이 만나는 소리, 치아에 닿은 사과가 부서지며 사각사각 사라지는 소리뿐이다.
이 공연을 지은 이가 통과한 고통을 믿기에 한편 더욱 경계하기도 했다. 이 은밀한 세계를 열어 보이려는 이는, 그리하여 그 풍경을 모르는 이들을 설득하려는 이는 섣불리 상처로부터 회복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손상된 이들의 몸짓과 언어를 습득하고 구사하게 되기까지 뼈들은 쉬이 붙어서는 안 되었다.
그랬기에 회복의 과정이 마포대교의 자살방지 캠페인 문구와 겹쳐지는 공연의 후반부는 아쉬웠다. 회복의 과정은 압축적으로 생략되고, 두 사람은 마포대교에 적힌 메시지들에 힘입어 화해와 치유의 구간으로 신속하게 도착한다. 공연의 메시지는 통상적인 ‘힐링’의 말들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가까워진다.
모종의 긍정성 자체에 회의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고통 끝에 죽음으로 내몰리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받은 바로 그 메시지들을 통하여 다시금 삶을 축하한다는 점은 의문스럽다. 이는 우리 모두가 일정하게 재활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 어떤 고통이든 모종의 치유와 회복이, ‘정상화’가 가능하다는 공허하고도 교묘한 믿음과 쉬이 공모하며, 남은 생 동안 내내 고통의 나라에 머물 이들의 세계를 쉬이 감추어버린다.
갖가지 성공신화가 사람들을 매혹하고 의미 없는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오늘날에 이는 고통과 실패가 성장과 성공의 거름이라는 믿음, 그리하여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몫으로 전가하는 프로파간다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영영 회복되지 못하는 이들, 괜찮지 못한 채로 살아야 하는 이들, 부서짐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지 않을 이들은 그런 믿음에서 자꾸만 미끄러진다. 그것은 몸들을 자꾸만 죽음으로 몰아가는 세계의 거대한 폭력만큼 뼈아프다.
오히려 인상적이었던 것은 부서지는 순간의 고요다. 산산조각 날 때에, 우리가 우리 아닌 존재로 될 때에 우리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아닌 이들에게 도착할 때의 고요. 이는 그 자체로 불가능한 일이자 도래하지 않을 기적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인 패배 위에 있다. 그러나 이 공연이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단 한 번만 더 서로에게 도착하기를 바라는 이들의 사랑노래라면, 그것은 반드시 성취해야만 하는 패배다. 우리는 그 사랑을 위해서 때로 우리에게 몹시 중요한 무엇인가를, 우리 자신의 손으로, 고요하고 순정하게 쪼개고 마는 것이다.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1년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공연 리뷰 작성 지원으로 작성된 글을 축약, 수정하여 게재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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