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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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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면/연극비평

우루라는 이름의 우루, 혹은 우리라는 이름의 우리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4. 5. 20:21

우루라는 이름의 우루, 혹은 우리라는 이름의 우리

: 공연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_하은빈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제작 안티무민클럽AMC, 원작 배수아, 이하 <우루>)2020년 겨울 올리려다가 좌절된 공연이다. 다시 무대에 오르기까지 2년 여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장소는 신림중앙시장에서 TINC(구 명성교회)로 옮겨갔고, 세 명의 우루는 두 명의 우루가 되었다.

퍼포머에서 빠지는 대신 움직임을 짓고 무대 바깥에 머무르며 이 공연을 무수히 다시 보았다. 공연은 어떻게 해도 그림이 맞지 않는 퍼즐처럼 좀체 꿰어지지 않았고 아무리 잊으려 해도 망각을 깨고 터져나와내게서 말을 빼앗아갔다. 이 글은 나를 관통하면서 지나간그 몰이해를 바탕으로 쓰여진 경험담이다. 혹은 우루라는 묘연한 여자에 관한 목격담이기도, 최초라는 미지의 사건에 대한 기담이기도 하다.

 

사진 촬영 : 김태리

무대에 두 여자가 있다. 수화기 너머의 한 여자가 막 잠에서 깨어난 다른 여자를 우루라고 부른다. 기억을 상기시키려는 열띤 회상이 이어진다. 우루가 모든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바다로 갔다고. 자신은 우루의 뒤를 따른 첫 번째 아이였으며 그것이 자신이 본 최초의 바다였다고. 잠에서 깬 여자는 우루라는 이름도, 바다에 대한 이야기도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전화가 이내 끊어진다.

이윽고 그들은 두 소녀가 된다. “글을 쓸 줄도, 계산을 하거나 시계를 볼 줄도모르는 소녀들은 훔친 옷을 입은 채 학교에 가고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잠이 든다. 누구도 그들에게 언어를 주거나 셈을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쥐들처럼 이곳저곳을 쫓겨다닐 뿐 인식되지도 기억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유난히 생생하면서 음침하고, 항상 같은 풍경인서로의 꿈속에서만 보이고 들리고 만져진다. 서로의 기억과 놀이 속에서만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존재는 상상에 다름 아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 우루는 어떤 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 날 게릴라 공연을 하다가 돌연히 죽었다는, 우루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한 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우루는 그 자리에서 돌발적인 결말을 가진 연극 한 편을 구상한다. 초록색 담요를 뒤집어쓴 한 여자가 무대 위에 머무르는 게 전부인 연극이다. 그녀는 덧붙인다. “무대에는 그 말고도 배우가 한 명 더 있죠.” 상대가 묻는다. “그게 누굽니까?” 우루가 몸을 기울여 들리지 않게 귓속말한다.

어느덧 무대는 다시 교실이 되고, 한 아이가 손을 들어 질문한다. “선생님, 아름다움이 무엇인데요?” 교사는 따뜻하고 애틋한 어조로 일러준다. “존재는 상상이고, 삶은 발명하는 것이며, 아름다움은 후회하는 것이야.” 이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아이가 학교에서 얻은 유일한 진실이다. 머지않아 아이는 교사에게 뺨을 맞고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루>의 이곳저곳에는 죽음이 돌부리처럼 뭉툭하게 돌출되어 있다. 두 배우는 번갈아 가며 죽는 이 혹은 죽이는 이가 된다. 뺨을 맞은 아이는 쓰러져 눈을 뜨지 않고, 연극을 하던 배우는 돌연히 죽어 상대 배우에 의해 은닉된다. 그것은 다시 깨어나리라는 점에서는 잠이고 자신을 망실한다는 점에서는 죽음이다.

약속된 연극이 끊어지면 공연은 알 수 없는 구간에서 재시작된다. 우루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깨어나거나 혹은 태어난다. 죽은 줄 알았던 소녀는 벌떡 일어나 느닷없이 연극을 시작하고, 잠에서 막 깬 여자는 홀연히 배운 적 없는 춤을 스스로의 뺨을 때리면서 촉발되고 지속하는 춤을 춘다.

그 삶은 살아가는 일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발명하는 일에 가깝다. 시작 없이 지속되고 결말 없이 끝나는 놀이처럼, 공연은 때로 튀거나 늘어지면서 막다른 구간을 반복재생한다. 실뜨기 놀이가 같은 모양이 되기를 반복하다 이내 엉켜버릴 때, 공연은 헝클어진 지점들을 내버려 두고 또 다른 놀이로 옮겨간다. 우루는 게릴라 연극 속에, 고무줄놀이 속에, 실뜨기 놀이 속에 산다.

그러나 계속해서 과거와 맞닥뜨리는 까닭에 우루는 최초라는 사건에 끊임없이 연루된다. 우루의 춤-걸음이 컴컴한 과거를 향하므로 공연은 곧 암흑과 추는 느린 듀엣이 된다. 우루가 볕을 향해 뻗어갈 때 어둠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우루의 눈을 가린다. 암흑이 부드럽게 몸을 끌어안으면 몸들은 곧 구분할 수 없이 뒤엉킨다. 어둠이 그녀로부터 기억과 역사를 회수하고 망각의 해변으로 그녀의 몸을 떠밀어갈 것이다. 우루는 자신을 잃은 채 말간 얼굴로 낯선 시간 위에서 다시 깨어날 것이다.

 

 

최초의 사건이 무엇이었는지는 불투명하다. 어쩌면 우루는 우루(Uru)라는 그 이름이 가리키듯 최초(Ur) 그 자체다. 낯선 이가 우루를 알아볼 때마다, 우루에게서 기시감의 몸짓이 반복될 때마다 관객은 어렴풋이 예감할 뿐이다. 과거가 영원히 되돌아올 것임을. 상실이 무한히 연속될 것임을. 그런 점에서 무대 위의 다른 배우는 또 한 명의 우루이기도 하고, 혹은 우루의 실패이기도, 상실이기도, 죽음이기도 하다.

반투명한 수면 睡眠 혹은 水面 아래서 헤엄치는 우루에게 또 다른 우루가 말한다. “당신은 실패해.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받는 일에. 그게 아니라면, 살아가거나 혹은 살게 하는 일에.” 한편 이렇게도 말한다. “너는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내가 자리를 뜨는 일 없이 계속 객석에 앉아 너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내가 너를 바라보고 너의 목소리를 들을 테니까.” 왜 그런 연극을 하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한다. “존재는 상상이고, 삶은 발명하는 것이며, 아름다움은 후회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아름다움은 후회하는 것이라는 우루의 말에서, 무엇도 돌이키거나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저주나 비관보다는 모종의 다정과 슬픔을 읽는다. 진실된 후회를 하는 사람의 애틋한 표정을. 지나가버린 무엇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의 하염없는 시선을. 돌이켜지지도 붙잡히지도 않을 무엇으로부터 떠나지도 멀어지지도 못하는 이의 걸음을. 그것이 몰고 올 슬픔을 알면서도 너무나 아름답고 그리워서 언제까지고 다시 뒤돌아보는 마음을.

어떤 면에서 이 공연은 상실과 실패를 앞서서 모조리 통과한 우루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애달픈 축하이다. 삶이라는 기이한 무대에서 처참히 넘어지는 우루를, 그 자신만은 끝까지 목격할 것이라고. 사랑하는 일에도 살아가는 일에도 실패하는 우루를, 그 자신만은 끝까지 사랑하고 또 살게 할 것이라고. 우루가 잃어버린 것들만이 우루 곁에 남아 우루를 지켜볼 것이다. 우루가 잃어버린 것들만이 비로소 우루가 될 것이다.

우루라는 이름의 우루를 우리라는 이름의 우리로 다시 고쳐 읽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만이 우리 곁에 남아 우리를 지켜볼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만이 비로소 우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