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극장 혹은 밀폐된 광장 : 어떤 삶이 보이고 들리도록 하기 위하여 본문

8면/연극비평

극장 혹은 밀폐된 광장 : 어떤 삶이 보이고 들리도록 하기 위하여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11. 14. 13:19

극장 혹은 밀폐된 광장 : 어떤 삶이 보이고 들리도록 하기 위하여

- 연극 <만나면 좋은 친구 : 근로기준법 상 근로자 및 신분을 이유로 행한 차별 진정 건>

 

나의 할아버지 하로만은 목포와 제주, 영암 등지를 돌며 일하는 방송기술자였다. 마지막으로 목포에 들어오기 전에는 신안의 먼 섬인 가거도에서 등대지기로 일했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잘렸는데, 그의 상사가 원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 대신 앉혀야 했기 때문이다. 실직한 그는 목포에 들어와 KBS에 취직했다. 가난한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졌다. 방송국에서 방송공사로 직장의 이름이 바뀌었을 때는 큰맘먹고 냉장고를 들이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대대적인 언론탄압과 통폐합, 인원감축이 있었다. 목포KBS의 국장과 부장과 차장이 줄줄이 잘렸다. 로만은 기술부 차장이었다. 원래도 좋지 않던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로만은 알콜중독자가 되었다. 군사정권과 방송국을 원망했으며 나의 할머니 전춘자에 대고 너네 전씨가 나를 잘랐다며 미워했다.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춘자에게 손찌검을 하고 가족을 못살게 굴며 오랜 세월을 보내다가 내가 태어날 즈음에는 술병으로 죽는다.

 

연극 <만나면 좋은 친구: 근로기준법 상 근로자 및 신분을 이유로 행한 차별 진정 건>(·연출 김기일, 제작 엘리펀트룸, 주최 혜화동1번지 7기 동인 / 이하 <만나면 좋은 친구>)을 보며 괴로웠던 것은 내가 단순히 로만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기시감에 가까웠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보여도 어떤 일은 여전히 반복된다는 기시감. 잘 보이지 않고 대개는 인지조차 못한 채 누리는 일상의 윤택함과, 그 편이를 떠받치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역시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누군가의 긴급한 삶. 일정한 정치적 성취 혹은 변화라고 할 만한 것들마저 슬쩍 발디디고 있는, 오래도록 유지되어온 부조리의 바로 그 오래도록 변화하지 않음.

<만나면 좋은 친구>의 무대 가운데에는 텔레비전들이 쌓여있다. 앞뒤로 볼록 튀어나와 있고 화면이 둥그렇게 휜 옛날 텔레비전이다. 과거 MBC의 방송 프로그램이며 광고 화면이 송출되고 있고, 그 시절의 방송 음향이 어디선가 흘러나온다. 텔레비전 무더기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둘러앉은 관객 사이에서, 세 명의 배우들이 대사를 시작한다. 공연은 객석에 앉은 채 발화하는 배우들의 빽빽하고 조밀한 대사들로 이루어진다. 2010년부터 MBC에서 일해온 84년생 A씨의 이야기가 중심축에 놓인다. 미래의 노동자 A씨가 자라나 현재의 노동자 A씨가 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노동유연화 및 고용 조건의 변천과 악화가,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언론의 영합과 저항의 역사가 부단히 교차한다.

2010A씨가 MBC의 프리랜서 CG 기술자로 입사하게 됨에 따라 이야기는 점차 MBC 사내의 상황으로 수렴한다. 프리랜서 계약직 직원인 A씨는 사원증이 아니라 목걸이줄 색깔이 다른 출입증을 찍으며 출근하고, 근로계약이 아닌 용역계약을 체결하며, 야근수당도 추가수당도 없는 근로조건을 오래 지속한다. A씨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므로 이중의 차별 속에서 일한다. MBC라는 거대기업으로부터도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받지 못하고, 정규직 공채 사원들만 소속되는 노동조합에도 가입할 수 없으므로 사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다. MBC 노조가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파업을 이어가는 동안 A씨와 계약직 동료들은 그들 대신 상근하며 방송을 만든다. 파업의 실패와 승리에 따라 엎치락뒤치락 보복인사의 피바람이 부는 동안 A씨는 여전히 비정규직인 채로 출근한다.

간신히 전문직 노동자가 되어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된 후 A씨는 자신이 합의한 바 없는 노사합의서에 따라 결정된 봉급과 호봉에 대해 듣게 된다. 봉급은 일반직 직원의 60퍼센트 남짓인 데다가, 호봉은 그가 비정규직 프리랜서로 일했던 시간들을 생략한 채 턱없이 낮게 매겨져 있다. 어렵게 동료들을 꾸려 찾은 노 사무실에서는 이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들의 문제 제기에 노조 측에서는 떨떠름한 얼굴로 저희 기분이 좀 그렇다고 밝힌다. 생각을 좀 해보라며 이렇게 덧붙인다. “여러분들을 평등하게 대우한다면 여러분들을 올리겠어요, 저희를 낮추겠어요? 회사 사정도 어려운데.” A씨와 동료들은 모멸감을 느끼며 노조사무실을 떠난다.

<만나면 좋은 친구>를 관람하며 고민스러웠던 지점은 이 작품을 반드시 연극으로 만들어야만 했던 이유다. <만나면 좋은 친구>가 구축한 극장은 일종의 밀폐된 광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극장 공간에서만 시도될 수 있는 재현과 현시의 전략들을 최소화하고, 정치적 메시지를 가능한 한 명징하고 직설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복잡다단하게 전개되는 밀도 높은 사실들을 오로지 배우의 대사만으로 전달하는 일은 배우에게나 관객에게나 힘에 부쳤다. 한편으로는 동일한 내용을 방송으로 송출 가능한 영상으로 제작하는 것이 더 기획에 부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극장이라는 선택이 불가피해 보이기도 했다. 끝없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텔레비전과 방송국이 정작 그 이야기들을 만드는 무수히 많은 노동자들에 대해서만은 기어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극장이라는 선택은 이들에게 어쩌면 필연적인 귀결일지도 몰랐다. 극장은 분명 무언가를 조명 아래 드러내는 공간이므로.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어떤 삶을 이토록 선명하게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는 매체로서 유효하기 때문에.

공연을 보는 동안 마음이 자주 답답하여 무대 중앙의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깜박거리는 화면을 보며 나의 할머니 전춘자를 생각했다. 밤이며 낮이며 텔레비전이 꺼질 일 없는 춘자의 방과, 드라마의 다음 화를 보기 위해 하루도 더 살고 일주일도 더 사는 춘자의 텔레비전 사랑을 떠올렸다. 춘자의 가장 가깝고 좋은 친구인 텔레비전은 또한 로만을 고꾸라뜨리고 재기하지 못하게 한 바로 그 텔레비전이기도 하다는 것을, 지금의 춘자를 웃게 하고 살게 하는 숱한 방송들을 만들기 위해 또다른 이들이 울고 잘리고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자,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실패한 농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