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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흔들리는 그네가 조금씩 더 높이 올라가듯이 본문
흔들리는 그네가 조금씩 더 높이 올라가듯이
: 연극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하은빈
연극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연출 이래은, 대본 이오진, 제작 달과아이극단 / 이하 <김이박>)의 객석에 앉아있는 동안 생각했다. 이 극이 보이는 모든 시시콜콜한 불합리를 통과하며 자랐다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김이박의 얼굴들을 다 알아볼 수 있다고. 한때 나의 것이었던 이 얼굴들을 어떻게 다 잊을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기로 한 것이구나. 이들을 잊으면서 비겁하게도 성인이 되었구나.
그러나 <김이박>의 소개 글처럼 “우리는 베개처럼 닿아 있”다. 결별한 듯 보였던 지난 시간은 서로의 끝을 겹치며 현재까지 연결되어 있다. 내 것인 줄만 알았던 경험은 촘촘한 연관을 이루는 총체적 구조의 일부이다. 언젠가 동료 안담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관해 이렇게 썼다. “거대하고 견고한 성을 이루는 작은 못으로서의 나를 본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못,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못의 끝나지 않는 연쇄를 직시한다.”* 연극 <김이박>은 그 작은 못들에 일일이 기억의 알전구를 걸어 비춘다.
1992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여성 청소년 김이박의 경험과 2008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여성 청소년 김이박의 경험이 무대 위에서 교차한다. 실로 높은 해상도의 미시사(微視史)가 알알이 쓰이는 가운데, 두 김이박의 경험은 16년의 시차를 넘어 자주 포개진다. 이들의 닮음은 무엇보다도 유예된 현재를 살아간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입시라는 명목 아래 김이박이 지금 느끼는 것, 바라는 것, 욕망하는 것은 모조리 미래의 시간으로 밀쳐지므로. 김이박은 어른들이 약속한 미래의 시간을 위해 교복을 입고 책상 앞에 앉아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 자신에 괄호를 친다.
유예된 현재를 산다는 것은, 언제나 몸을 통제하고 욕망을 삭제하도록 훈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것을 억압하고 느끼지 않게끔 학습한다는 뜻이다. 김이박은 모순된 논리를 내면화하며 자란다. 늘 웃어야 하는 동시에 너무 활짝 웃어서는 안 되고, 생리하되 피 냄새가 나지 않도록 다리를 오므려야 하며, 브래지어를 하되 면 나시와 줄을 맞추어 브래지어 끈을 가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휴거 파동이 일고 광화문 광장에 구름 같은 인파가 모여 집회를 하는 수상한 시절이지만, “이럴 때가 아니”므로 김이박은 책상 앞에 붙어 앉는다. “분명히 어떤 일이 있었는데 없던 것처럼 흘러갈 때가 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김이박은 자주 갸웃거린다.
이렇듯 청소년의 현재를 뒤틀어놓는 일은, 구조의 부조리와 일상화된 폭력이 발생시키는 혼란과 불안을 쉬이 청소년에게 전가한다. 하여 김이박은 크고 작은 피해에 언제나 노출되는 동시에, 늘 타인에 대한 가해와 폭력에 연루되고 가담한다. 김이박은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를 주무르는 선생들의 손길을 사랑이라고 여기고, 불합리한 이유로 호통을 치는 선생에게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빈다. 한편 같은 학교 ‘대걸레’가 찍혔다는 몸캠을 검색해보며, 선생과 교제한다는 ‘고삼언니’에 관한 유언비어를 부풀리고 유포한다. 두 김이박의 10대를 살피는 일은 그 시절에 점철된 크고 작은 폭력의 요철을 하나하나 더듬는 일이다. “사는 게 모래 지옥같았어.” 김이박은 문득 울먹인다.
그러나 <김이박>의 몇몇 장면들은 반복되는 가운데 미세하게 변화하며 차이를 빚어낸다. 그 차이의 단서는 다시 김이박에게서, 불완전하게나마 기억하고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김이박의 시도에게서 발견된다. “많은 애들이 그걸 사랑이라고 여겼다”라는 대사는 극 후반에 이르러 가까스로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처음 생각했던 것 같다”로 한 발짝 옮겨간다. 모두가 ‘대걸레’라고만 부르던 김미진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김이박은 언젠가 아파트 근처에서 그가 동생 손을 잡고 가던 모습을, 체육 시간에 얼마나 농구를 잘 했는지를 기억해낸다. 시위의 의미로 무수히 운동장에 내려앉았던 종이비행기들을 떠올리고, “네가 왜 무릎 꿇어?” 하고 외치며 학교의 부당한 색출을 멈추어냈던 아이를 생각하면서 그 장면에 이름을 붙인다. “나는 이것을 작은 승리로 기억한다.”
김이박의 이러한 기억하기는 단발적이고, 쉬이 끊기며, “뭐였더라?” “잘 기억 안 난다”로 자주 끝난다. 그러나 연극 <김이박>은 이러한 기억의 부정확함, 불분명함을 탓하고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물리법칙 ‘불확정성의 원리’에 기대어 옹호한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사람이 모두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순간 우주와 나는 서로가 모르는 채 상호작용하고 있다.” <김이박>은 주저하고 망설이지만 조금씩 더 나아간다. 헐거운 기억과 기억 사이에 이는 진동의 궤적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흔들리는 그네가 진자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높이 올라가듯이.
연극 <김이박>은 잊히지 않았더라면 달라질 수도 있었던, 그러나 꾸준히 망각되어온, 하여 어딘가에서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장면들을 현재화한다. 조금씩 발생할 변화의 양상을 기민히 감각하며, 아직 아무도 모르는 불확정적 미래를 향해 손을 내젓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마돈나의 <Express yourself>를 열창하며.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에 맞춰 있는 힘껏 춤추며. 기억의 전구들은 이따금 켜지고 자주 꺼지며 계속해서 흔들린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불분명한 기억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러나 연극 <김이박>은 상기한다. 1992년에도, 2008년에도, 2021년에도 김이박은 새로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현재를 변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었던 것들에 쳐진 괄호를 벗겨낼 때, “나와 나의 세계가 조금은 변한다.” 그러므로 서로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며, 우리는 알지 못하는 미래를 향해 불완전한 채로 조금씩 더 멀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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