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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물이 불이 되는 동안: 연극 <초상집 개에 대한 연구1_누룩의 시간> 리뷰 본문
물이 불이 되는 동안 : 연극 <초상집 개에 대한 연구1_누룩의 시간> 리뷰
하은빈
“물에서 불이 나온대서 수불 아닌감. 수불이 술이여.”* 연극 〈초상집 개에 대한 연구1_누룩의 시간〉(작 연출 김풍년, 극단 작당모의) 속 송춘남의 말이다. 얼만큼의 우여곡절일까, 물이 불이 된다는 것은. 곰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술이 되는 만큼의 복잡다단함일까. 혹은 어린아이가 할머니가 되고 삶이 삭아 죽음이 되는 만큼의 고단함일까. 〈누룩의 시간〉은 그 특이점에 관한 이야기다. “이짝에서 저짝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순간, 이것이 저것이 되는 발효의 찰나, 그리고 이쪽과 저쪽의 분리조차 희미해지는, 무자비하고도 압도적인 무화와 합일에 대한.
남쪽 나라 봄볕같이 따뜻하라고 지었다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춘남의 팔자는 박복하다. 그의 삶 어귀에서 호시탐탐 넘어온 죽음이 춘남의 근처에 거친 빗금을 마구 긋기 때문이다. 빗금은 곧 무차별적인 비극이 되어 춘남의 주변인들을 앗아간다. 춘남에게 술 빚는 방법을 가르쳤던 괴팍하고 다정한 시할머니가, 헛바람 들어 소식이 뜸해지던 남편이, 서울서 고향까지 제사 지내러 온 아들 며느리 내외가 차례차례 춘남의 곁을 떠나 죽음의 세계로 건너간다. “오종종하고 빙춘 맞게” 생겨 “손 구하겄다”는 시할머니의 예언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고, 춘남의 집에는 사람 잡아먹는 귀신이 들렸다는 소문이 흉흉히 떠돈다.
춘남은 한동안 살아갈 의지를 찾지 못한다. 시꺼먼 하늘은 연신 “포랬다가 히였다가 뽈겋”기를 반복하고, 넋을 잃은 춘남은 길을 잃고 중얼거린다. “시상천지 아모리 늛다히도 왼발 가고, 그담이루 오른발 가야 허는 마땅한 까닭을 찾을 수가 읍더란 말이여.” “누룩 가득한 술독” 같은 세상 속에서 춘남의 두 발은 미처 떨어지지 않는다. 삶의 허무와 무의미함이 춘남의 몸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춘남은 천길 꿈속에서조차 ‘저짝’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죽은 자들의 세계에 다다르지 못한다. 망자들과 달리 춘남에게는 여전히 몸이 있기 때문이다. “이짝이랑 저짝이 우덜 눈이루는 안 봬는 비니루가 쳐진 모냥이지?” 한탄하는 춘남에게, 몸이란 곧 사랑하는 이들과의 단절이고 분리이다. 춘남에게 삶이란 곧 죽음과 진배없다.
그럼에도 춘남이 두껍고 막막한 생의 허무를 기어코 뚫는 것은, 온몸을 밀어 바락바락 삶으로 돌아오는 것은 유일한 혈육인 손녀 고은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손녀 고은의 삶과 꿈을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서 춘남은 한겨울같이 매서운 팔자에 스스로를 재차 담금질한다. 이따금 ‘탄 깨스’의 섬망에 시달려 혼비백산 허공에 팔을 휘두르거나 허겁지겁 기차에서 내리기도 하지만, 춘남은 수상한 열기에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술을 빚으며 견딘다. “누룩이 쉬이 부풀면 망조”라는 것을 되새기면서, 그럴수록 더 낮은 온도에서 진득하게 밑술을 내려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고은의 살에서 깊은 누룩내를 맡을 때면, 그 어떤 술도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춘남의 가슴에 슬며시 떠오른다. 그러한 바람으로 춘남은 다시금 항아리를 흔들고 누룩을 띄운다.
객석은 송춘남을 연기하는 배우 박은경의 아우라에 압도되어 한참 동안 조용했다. 그러다 박은경이 할머니 춘남과 손녀 구고은을 오가며 열연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간간이 웃음 지었다. 고은은 숫기 없고 재능있는 신예의 탁구선수로 무럭무럭 성장한다. 그런 고은을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에도 따스한 즐거움과 기대가 어린다. 그렇기에 극의 후반부에서 암시되는 고은의 죽음은 급작스럽고 당혹스럽다. 봄볕의 어중간한 열기에 누룩이 쉬이 부풀어버린 것일까, 금방 망조가 어려 탈이 난 것일까. 엄동설한의 어느 겨울날, 홀로 남겨진 춘남은 손수 담근 독한 술을 마시며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몸띵이에 불붙이는” 독주가 춘남을 ‘저짝’의 자리로 옮겨놓자, 비로소 저쪽 세계의 고은이 춘남의 부름에 응한다. 만발하여 터지는 누룩꽃밭 속에서 고은은 춘남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마신다. 배우 박은경은 춘남이 되었다가 고은이 되었다가를 반복하고, 춘남은 누룩꽃 사이를 진동하며 표표히 죽음을 향해 간다.
여기까지 적고 나면, 잠시간의 온기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만 같은 춘남의 사나운 팔자가 모질고 야속하게만 보인다. 어쩌면 이렇게 묻고 싶어지기도 한다. 봄볕같이 따뜻하라는 춘남의 이름은 사실 삶이 구사하는 못된 농담인 것은 아니냐고, 혹은 예정된 죽음이 건네는 얄궂은 안부 인사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한편으로 이 지점에서, 연극 〈누룩의 시간〉은 삶을 잡아먹는 죽음이 아닌 “삶을 완성하는”** 죽음에 관한 극임이 드러난다. 물로 불을 빚어내기까지의 인고를 담기 위해, “어느 때가 되믄 이짝 저짝 편 가릴 거 읍시 한나가 되”는 “누룩의 시간”에 다다르기 위해 공연은 춘남이 온몸으로 절박하게 자신의 팔자와 겨루는 것을 끝까지 추적한다. 춘남의 몸과 삶은 그러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누룩과 꼬두밥이 죽어라고 치고받는” 술독이다. 공연 내내 백스테이지에서 알 수 없는 윤곽으로 끼워 맞춰지던 널빤지 조각들이 이내 커다란 항아리 모양으로 완성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작가 권여선은 『레몬』에서 죽음에 관하여 이렇게 썼다.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고.*** 까닭 모르게 지난했던 삶의 지속을 중단하고 춘남의 삶을 마무리 짓는 것은 일견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그러나 사실은 “공평무사하고 숭고한” 죽음이다. 춘남이 비로소 저쪽 세계로 옮겨가는 것은, 서로를 불러세우고 알아볼 수 있는 세계에 도착하는 것은 죽음이 춘남으로부터 몸을 벗겨냈기 때문이다. 춘남을 춘남이 아닌 몸으로, 그 ‘누구도 아닌 몸’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고은과 비로소 만나진다는 점에서, “인자사 울 애기랑 한나가” 된다는 점에서 춘남에게 죽음은 삶이나 진배없다. 그렇다면 춘남의 죽음은 팔자에 패배한 결과가 아니라 죽음을 경유하여 사랑했던 이와 재회하는 화해일 것이다. 혹은 물이 불이 되도록 삶을 힘껏 구부려 이른 긍정일 것이다.
*큰따옴표로 표기한 모든 인용은 월간 -한국연극- 8월 호 91~98쪽에 실린 희곡 〈초상집 개에 대한 연구1_누룩의 시간〉(작, 김풍년)으로부터 발췌하였다.
**〈누룩의 시간〉 극작의도 참조.
***권여선, 『레몬』, 창비, 2019,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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