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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우리는 무용수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공연 <무용수-되기 Becoming-Dancer> 본문

8면/연극비평

우리는 무용수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공연 <무용수-되기 Becoming-Dancer>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12. 4. 00:41

우리는 무용수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 공연 <무용수-되기 Becoming-Dancer> 

 

 

하은빈

연극평론가

 

 더 킬러스(The Killers)의 노래 <Human>에서는 이런 후렴구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우리는 사람일까? 아니라면 댄서일까?(Are we human? Or, Are we dancer?)” 노래를 작사한 브랜든 플라워스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헌터 톰슨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미국은 댄서들의 세대를 길러내고 있어요. 혹여 잘못될까 우려스럽습니다.”⑴  넌센스에는 넌센스로 받아치겠다는 양 플라워스는 이 이상한 노랫말을 거듭 되뇐다. “우리는 사람일까? 아니라면 댄서일까?” 농담이라기엔 그의 얼굴은 너무 결연하고 또 태연하다. 댄스곡의 비트는 점점 고양되어간다. 사람이건 아니건 춤을 추겠다는 듯이.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댄서가 되겠다는 듯이. 

 <무용수-되기>는 장애 예술 창작자이자 장애 당사자인 김원영과, 안무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공연을 만들어온 프로젝트 이인’(라시내, 최기섭)이 협업하여 만든 공연이다. 비장애 신체를 가진 기섭과, 지체 장애를 가지고 수동휠체어를 사용하는 원영이 퍼포머로 나란히 무대에 섰다. 그런데 이들의 기획이 무용수-되기라는 사실은 새삼 의아하다. 아직 이들의 몸은 무용수가 아니라는 뜻일까? 춤추는 저 몸이 무용수가 아니라면 무엇이 어떤 몸을 무용수로 만들어내는가? 공연 <무용수-되기>는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춤추며, 플라워스의 저 아이러니컬한 가사를 전유해 이렇게 묻는 듯하다. “우리는 무용수일까?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 공연 <무용수-되기>가 이본 라이너의 <Trio A>를 추며 시작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Trio A> 1966 1월 뉴욕의 저드슨 메모리얼 교회에서 초연된 이본 라이너의 작품으로서, 고전발레의 기교도, 모던댄스의 표현적 움직임도 아닌 영역으로까지 춤의 영토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무용사적 의의를 지닌다. 라이너는 이 작품을 통해 그 어떤 움직임도 춤이 될 수 있다고 선언했으며 무용수와 비무용수의 관습적 구분을 무너뜨리고 다양한 몸을 춤의 영역에 들였다고 평가받았다. 무용학자 샐리 베인즈는 이러한 몸들을 일컬어 민주주의의 몸이라고 명명했다.⑵

 그러나 <무용수-되기>는 그 어떤 움직임도 춤이 될 수 있다는 라이너의 오랜 선언을 다시금 의문에 부친다. 원영과 기섭은 <Trio A>를 추기 위해 이중의 번역을 거쳐야 했다. 먼저 <Trio A>를 휠체어 위에서 가능한 움직임으로 번역한 후, 이를 다시 비장애인의 움직임으로 옮긴 것이다. 그럼에도 원영이 추는 <Trio A>, 나란히 선 기섭이 추는 <Trio A>와 비교했을 때 다수의 동작을 누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로 하체를 사용하는 몸짓들이 생략된 데다가, 몸의 방향을 바꿀 때나 큰 동선을 사용할 때에는 움직임의 많은 부분이 주로 휠체어를 통제하는 데에 할애된다. 

 이러한 생략과 누락을 필연적으로 포함한 채 추게 되는 <Trio A>는 동시대 춤의 무대가 정말로 모든 몸들에게 열려왔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들이 <Trio A>를 변형시키지 않고선 이 춤을 출 수 없다는 사실은 어떤 몸들이 여전히 모든 몸으로부터 자연스레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의 <Trio A>가 모종의 불완전성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이들의 몸이 가진 결여나 결함 때문이 아니라 <Trio A>로 위시되는 춤의 세계의 한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유구한 고전이 대상으로 삼는 민주주의의 몸이란 과연 누구의 몸을 가리키는가? 초연된 지 45년이 지나 다시 추어지면서 이들의 <Trio A>는 여전히 공고하게 유지되어온 춤의 경계를 그리고 그 경계 너머에 있었던 어떤 몸들을 드러낸다. 

 이어지는 솔로 장면에서 원영은 휠체어에 앉아 손목의 움직임에서 출발하여 팔꿈치와 어깨로, 곧 온몸으로 연결되는 움직임에 골몰한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원영의 몸짓이 춤을 추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춤과 적대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몸에 찾아든 춤이 낯설기 그지없다는 것처럼, 자신은 그 춤의 주체가 아니라 그 춤의 타자라는 것처럼 춤춘다. 말하자면 원영은 춤을 추면서 춤에 합일되는 것이 아니라 춤 속에서 분열하고 내파한다. 역설적이게도 원영이 자신의 몸을 무용수의 지위로 이행시키는 것은 바로 (앞서 <Trio A>에서부터 그어진) 몸과 춤의 경계 위에 스스로를 위치 지으면서이다. 그 분할과 결별의 지점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그는 자신에게 깃든 춤에 가열차게 불화한다. 이제껏 춤의 세계에 초대된 적 없던 원영의 몸은 춤과 적대하고 저항하는 거친 파열음 속에서 무용수의 몸으로 눈부시게 전화(轉化)한다. 

 한편 기섭과 원영이 느린 템포로 추는 바닥 시퀀스에 이르면 두 몸이 가진 불완전함과 유한함은 비로소 결여나 불능이 아니라 차이 자체로서 드러난다.” 이 장면은 하나의 스코어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변주함으로써 진행된다. 스코어는 각기 다른 두 춤을 발생시키고 지탱한다. 그러나 두 몸의 차이를 어떤 동일성 속에 욱여넣지도, 가능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인해 두 몸을 소외하지도 않은 채 거듭 되풀이될 뿐이다. 처음에는 동일한 동작처럼 보였던 시퀀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몸의 차이로 인해 혹은 같은 스코어의 서로 다른 수행으로 인해 점점 갈라진다.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던 둘은 어느 순간 각기 다른 지점에 도착하고, 각자의 도착지점에서 몇 번이고 춤을 다시 시작한다. 

 만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이 무료하고 꿈결 같은 시퀀스를 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떤 세계의 모습을 가늠한다. 그것은 공연을 지은 이들이 꿈꾸는 바 누구나 가능한 존재 그 이상의 존재로서 노래하고 춤추며 살아가는 불가능한 세계. 서로 다른 몸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춤 속에서 조용히 거닐고 걷고 구르는 풍경, 혹은 서로의 차이를 나무라거나 도려내지 않은 채로도 평면 위에서 평등하게 마주치고 만나고 엇갈리고 헤어지는 풍경. 그런 세계를 상상하고 도모하는 몸들이 추는 긴긴 춤을 바라본다. 사람도 무용수도 아닌 채로도 개의치 않고 시작되는, 불가능한 세계를 향해 언제나 새로이 열리는, 결연하고 태연한 표정의 춤을. 

 

 

https://en.wikipedia.org/wiki/Human_(The_Killers_song)

 이 단락의 내용은 2020년에 초연된 <무용수-되기>의 음성해설 자료를 참고하였다.

2021년 재연된 <무용수-되기> 홍보글에서 인용. 다음 단락의 인용 역시 출처는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