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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믿지도 잊지도 못하는 어떤 안쪽 본문
믿지도 잊지도 못하는 어떤 안쪽
: 메테 에드바르센, <블랙>
드라마트루그 하은빈
블랙박스 극장에 들어서면, 호리호리한 중년의 백인 여성이 무대 구석에서 관객의 입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객석은 다소 어수선하다. 나는 메테 에드바르센(이하 ‘메테’)을, 북유럽에서 온 저 저명한 백인 안무가를 조금은 경계하면서 반대편 가장자리에 앉는다. 무대는 텅 비어있다. 공연은 오래전에 초연되었고 많은 투어를 거쳤을 텐데도 그는 조금 긴장한 것 같다.
이윽고 메테는 무대 위를 걸어 다니며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table table table table table table table table…” 그러자 식탁이 생겨난다. 아니, 정말로 생겨나지는 않았다. 여전히 빈 무대다. 그저 주문을 외듯 나직하게 여덟 번 부르면서, 없는 식탁이 있다는 듯 허공 어딘가를 손으로 쓸었을 뿐이다. 그러자 실제로 식탁은 얼마쯤 정말로 있게 된다. 우리가 메테를 믿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부재하는 사물들을 무대 위로 불러오고, 메테를 움직인다.
그런 식으로 메테는 의자에 앉고(“chair chair chair chair… sit sit sit sit…”), “망할 개”가 짖고(“bad bad bad bad… dog dog dog dog…”), 병에서는 물이 넘친다(“bottle bottle bottle bottle… wet wet wet wet…”). 보이지 않는 어떤 실내공간이, 투명한 집안의 풍경 같은 것이 무대 위로 옮겨오고 있다. 메테는 필요할 때 이동하거나 사물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그것을 잡거나 밀거나 만지는 등의 방식으로 사물의 윤곽을 표시한다. 한 대 맞은 기분이 든다. 이다지도 단순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무대에 어떤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고 한편 허망하다. 그것은 공연의 일이라기보다… 글의 일이 아니던가? 요컨대 그는 무대 위에서 몸과 말을 가지고 뭔가를 ‘쓰고’ 있다. 텅 빈 무대 곳곳에 메테가 언어로 씨앗을 심으면, 그곳에서 관객의 상상력이 자라나 무대를 채운다.
그러나 관객은 메테의 번역을 자주 놓치거나 길을 잃어버린다. 이를테면 모든 발화가 문장이 아니라 단어들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되는 새로운 사물과 사건으로 인해 관객이 앞선 일들을 잊어버리기 쉬워서, 혹은 언어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더군다나 외국어라면 더더욱) 시차와 지연이 생기는 까닭에, 아주 단순하게는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생각하느라고. 어쨌든 여러 가지 이유에서 무대 위 그 모든 (비)존재들의 기반은 몹시 가냘프다. 메테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오로지 ‘여덟 마디의 단어 읊기’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인도하고, 관객은 어둠 속에서 돌다리를 건너듯 이번 ‘지금-여기’에서 다음 ‘지금-여기’로 띄엄띄엄 건너간다.
언뜻 보기에는 별것 아닌 일들이 차례차례 묘사되며 지나간다. 화분의 잎들에는 먼지가 앉아 있고, 램프에서는 불빛이 빛나고, 바닥에 번진 물자국을 지우려 스펀지를 두드리는 따위의 일들이. 식탁 위의 사물들을 세어보고, 무언가를 휘갈겨 쓰고, 그러다 구겨버린 종이를 던지자 휴지통에 빗맞아 떨어지는 등의 일들이. 상상 속에서 잇달아 발생하고 그 즉시 사라지면서, 그 지극한 현존성으로 이것들은 어엿하게 공연의 일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나 이렇다 할 연관도 목적도 역사도 딱히 가지지 않는 채로 흩어지는 일들이.
개중에는 사건의 씨앗을 가진 장면들, 그러나 끝끝내 이야기로 움트지 않은 채 지나가는 장면들도 있다. 예컨대 문밖에서 나는, 하지만 메테가 응답하지 않고 무시해버린 누군가의 노크 소리. 서서히 메테의 왼손을 향해 가까워졌던, 그러나 이내 왼손 옆을 지나가 커피잔을 저으며 설탕을 녹이는 단도, 불현듯 울렸으나 결국 발신자가 드러나지 않은 전화벨 소리. 이런 장면들은 이 일상적인 실내 풍경을 깨뜨려버릴 무언가를 상기시킨다. 이곳의 외부를, 바깥을, 어떤 침입의 가능성을. 그러나 정작 이 흐릿한 실내, 부재하는 공간에 불쑥불쑥 침입하는 것은 바깥이 아니라, 바깥 그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다. 이 세계의 안내자 혹은 번역자로서의 메테가 형식 안에서 분열하거나 진동하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빨간 펜이 갑자기 파란 펜이 되거나, 현재형 동사가 과거형 동사가 되거나, 메테가 두 세계 사이에서의 번역을 멈추고 질문을 하거나 생각을 이어갈 때(“잠깐/저건/대체/어디/에서/온/걸까/ 나/한 번도/본 적/없는/건데/ 이거/그냥/깨지려고/여기/에/있었나”)*, 관객은 부재와 현존의 이 가물거리는 경계를 감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밖’의 부재라기보다도 ‘안’의 부재, 그러니까 이 실내공간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문제다. 지금까지 지난히 옮겨온 내부가 없으므로, 외부의 존재 역시 불가능해진다.
전화벨이 울리고(“ring ring ring ring…”) 메테는 전화를 받는다(“yes yes yes eys…”.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는 아무도 없다(“no no no no… voice voice voice voice…”).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메테는 지금까지 자신이 거주했던 무대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말한다. “아무것도 없다(no no no no… thing thing thing thing…)”. “의자”도, “나무”도, “개”도, “빛”도, 모두 없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지막으로,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달리 처음으로, 메테는 여덟 마디의 반복 없이 말한다. “Black”. 그러자 무대가 암전된다. 아니, 정말로 암전되지는 않았다. 무대는 여전히 밝다. 무대의 불을 잠시 꺼뜨린 것은 관객의 상상력이다. 객석에서 박수가 일고 메테는 인사한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하다. 공연 중일 때와 똑같이 여전히 무대가 밝고 텅 비었고 메테는 혼자 서 있는데 어느 순간 공연이 끝났고 그 실내공간은 사라졌고 공연의 시간 바깥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 의아하다. 본래 공연이란 그러한 것인데도 새삼스럽게 아연하다.
사람들이 객석을 떠나 로비로 나가기 시작하자 나는 조금은 절박하고도 다급하게 누군가를 붙들고 싶어진다. 무대 위에 메테 이외의 실내 풍경이 정말로 있었다고, 우리가 본 것이 같은 것이 맞다고 확인받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사물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귓가에는 부재하는 사물들의 이름이 자꾸만 메아리처럼 돌아오고, 나는 잠시 객석을 떠나지 못하고 어물거리며 서성인다. 안이 없으므로 밖도 불가능한 무대의 바깥에서, 몹시 근사한 공연을 본 관객이 으레 그렇듯이, 조금 전 사라진 세계의 안쪽을 믿지도 잊지도 못하면서.
*공연 이후 주어진 책자에서 인용하였다. Mette Edvardsen, Black, 2011. (번역 김신우, 제공 제3회 옵/신 페스티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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