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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8면/연극비평 (33)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연극이 아직 연극이 아니었을 때 - 연극 김민조(연극비평가) 다양한 종류의 연극 기원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극이 어디에서 어떻게 유래했는지를 끝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연극 양식에 대한 지식 구조가 일반적으로 정착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현존하는 인류학적 행위들로부터 연극성의 시원을 검출하려는 시도는 순환 논리의 덫에 걸려들기 십상이다. 예컨대 유년 시절의 소꿉놀이를 연극의 원형으로 지목할 수 있을까. 그것은 혹시 연극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어른이 그 뿌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을 소꿉놀이에 투사한 것은 아닐까. 소꿉놀이는 정말 자라서 연극이 될까. 비단 연극에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예술의 개념들이 모두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면, 그 개념이 탄생하기 ..
-전시 -연극 김민조(연극비평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초대의 인삿말조차 꺼내기 조심스러웠던 2020년 가을, 제주도의 한 커피숍에서 이라는 전시가 조용히 열렸다. 12년 전 군복무를 하던 도중에 동성애자임을 밝혔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던 제람을 포함하여 네 명의 동성애자 군인이 오랫동안 꺼낼 수 없었던 말과 기억을 기록한 전시였다. 전시 공간에는 그들이 편지처럼 빼곡이 글자를 적어내려간 병풍 형태의 설치물이 여러 개의 조를 이루며 세워져 있다. 서로 연결된 병풍들은 마치 기록자의 경험을 보호하는 것처럼 안쪽을 향해 오므려져 있기 때문에, 기록을 열람하고자 하는 관람객은 열려 있는 틈 사이로 진입해 병풍들이 이루는 반폐쇄형 공간 속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제람은 그 스팟을 어사일럼(Asylum)..
이름 없는 이삿짐들 연극 김민조(연극비평가) 나는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최종 정착하기 직전의 시대, 종교개혁 직전의 시대, 공산주의 운동 직전의 시대에 엄청난 매력을 느낀다. (…) 내가 볼 때 그 시대들의 메시지는, 상충하는 대의들 가운데 어느 것도 최종적 쟁점의 최종적 결론이 아닐 가능성, 우리로 하여금 대의 없이 사유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해줄 사유방식 및 생활방식이 있을 가능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 사유방식 및 생활방식을 가리키는 더 나은 이름이 없으니, 아니 아무 이름이 없으니, 인본의 방식이라고 부르자. 발터 벤야민이 “어슴푸레한 새벽의 넝마주이”라고 불렀던 20세기 전반기의 사회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그의 유고 모음집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
연극사 이후의 연극사를 쓰려면 연극 김민조 연극평론가, 연극비평집단 시선 필진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연극계가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한 2020년은 문화체육관광부가 공식적으로 지정한 ‘연극의 해’이기도 하다. (김방옥 구성 / 박근형 연출)는 올해 ‘2020 연극의 해’라는 사업명 아래 진행되었던 수많은 행사와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마무리되는 시점에 상연되었다. 연극의 존립이 가장 위태로워진 시기, “한국연극의 역사, 개념, 범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자는 취지”로 기획된 공연은 그 도전적 의의만으로도 많은 연극인의 주목을 받았다. 문자 중심의 도큐멘테이션(documentation)을 해체하는 공연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묻혀 있던 기록과 사라진 목소리들은 어떻게 무대 위에서 복원..
-연극 김민조 연극평론가, 연극비평집단 시선 필진 스마트, 혁신, 미래가치. 2010년대의 수많은 청년들을 꿈과 절망으로 밀어 넣었을 단어들이다. 예술 분야라 해서 다르지 않다. 신진과 유망과 중견이라는 트랙으로 계층화되어 있는 지원 사업의 구조 속에서 청년 예술가들은 치열하게 스스로를 증명하고, 소모되고, 어디론가 조금씩 사라져간다. 자기계발과 성장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예술 시장 속에서 놓여 있는 청년 예술가들에게 있어 적당한 시기에 청년을 졸업하지 못하고 적체되는 것은 상시적인 불안과 두려움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더 이상 ‘신진’을 대표할 수 없는 연차가 되었으나 ‘유망’해지지도 못한 상태로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 혁신의 가능성이 소진된 청년. 은 전윤환이라는 청년 연극인이 들려주는 ..
도둑맞은 몸들의 생환 연극 -김민조 (연극평론가, 연극비평집단 시선 필진) “집으로서의 몸. 하지만 몸은 몸들이 도둑맞고, 거짓과 독을 주입받고, 우리로부터 억지로 떼어내질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될 때에만 집일 수 있다.” 일라이 클레어는 퀴어 장애 정치학을 둘러싼 단상을 섬세하고 단호한 문장들로 적어 내려간 『망명과 자긍심』에서 이렇게 썼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신체에 대한 위화감(dysphoria)을 경험하는 것은 그가 퀴어이거나 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연유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그런 위화감을 만들어내는 것은 성별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몸에 대한 혐오, 장애에 대한 거짓말과 고정관념, 그밖에 우리가 몸을 통해 감각하고 수행하는 것들을 비정상으로 낙인찍는 모든 권력구조들이다..
-김민조 (연극평론가, 연극비평집단 시선 필진) 위기와 곡예, 코로나 시대의 서커스 연극 극장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 연극(적인 것)은 도처에서 상연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설치되는 흥행장이나 천막을 쳐서 만든 가설무대처럼 야외에서 상연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연극은 춤, 재담, 묘기 등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종목들 사이에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닌’ 그런 축제적인 이벤트 속에서 연극이 떨어져 나와 극장의 어둠 속으로 진입한 순간부터 우리가 지금 연극이라 부르고 있는 것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내(소)극장, 제4의 벽, 정숙한 관람 등을 표준적인 규약으로 삼는 서양 근대극의 모형은 1920년대를 지나며 식민지 조선에 빠르게 흡수되었..
- 김민조 (연극평론가, 연극비평집단 '시선' 필진) 사라져, 사라지지마 - 연극 연극은 사라진다. 연극이 상대적으로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1980)라는 곡이 40년 가까이 애창되고 있는 이유는, ‘연극’이 모든 신기루적 체험을 상징하는 단어로서 우리의 심적 사전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극은 빈 공간에서 홀연히 나타났다가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다가오고 사라진다는 것은 곧 일상의 성질,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로서의 삶이 본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이기도 하다. 연극이 삶의 정지인 동시에 삶 자체에 대한 은유가 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연극을 기록하는 평론가는 반드시 연극의 저항을 경험하게 된다. 기억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언어라는 매개를 거칠 때 소실되는 ‘형언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