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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위대한 사진 한 장과 기억의 노래 본문
위대한 사진 한 장과 기억의 노래
- <최후의 분대장-제1부 조선의용군>(김재엽 작·연출, 2024.10.26.~11.3.,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김향 (연극평론가, 호서대 교수)
어지러운 시기에 우리에게 역사적 인식이란 무엇인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3시간짜리 역사극이 공연되었다. 조선의용군 분대장 출신 소설가 김학철의 자서전(보리출판사, 2022)을 동명의 제목으로 연극화한 <최후의 분대장-제1부 조선의용군>이 그 작품이다. 이 연극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40명의 등장인물을 11명의 배우들이 1인 다역으로 연기하는 대작이기도 했다. 1928년 그가 12살이던 유년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해 19살에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가고 조선민족혁명당 당원으로 투쟁하다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의용대의 분대장이 되어 싸우다 투옥되어 고초를 겪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여 귀국할 때까지의 삶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극작과 연출의 특징은 등장인물들이 시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자료 조사와 현장 답사를 거친 다큐멘터리적인 극작이지만 그 형상화가 자유롭고 역사극 장르에서 볼 수 있는 비장미와 달리 함께 투쟁했던 의용군들에 대한 김학철의 유쾌한 경외감과 애정을 경험하게 된다. 엄혹한 현실 속 조선의용군들의 애국은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유와 조국의 민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줄 수 있는 당당한 사랑으로 경험되었다.
무대에는 철재와 나무로 만들어진 높고 낮은 책상과 의자들 그리고 둔덕 같은 계단들이 구역별로 놓여 있고 천장에는 10여 개가 넘는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 천들이 매달려 있다. 책상과 의자와 계단들은 교실에서 전투 공간까지 다양하게 변모한다. 겹겹이 쌓아놓기도 하고 눕혀놓기도 하면서 장면에 따라 각기 다른 배경으로 활용한다. 10여 개의 천들은 높이를 달리하며 여러 모양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이미지들이 투영되는 영사막 기능도 하며 때로는 깃발로 보이기도 하고 글씨를 쓰는 하얀 종이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글 쓰는 도구들인 책상과 의자와 공책이 여러 일상의 공간과 투쟁의 공간으로 변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용군의 활동을 기록한 김학철 자서전의 무대 형상화이면서 동시에 김재엽 작가이자 연출이 무대를 통해 시·청각적으로 김학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자유로운 극작과 연출은 2001년 김학철이 영면하는 사실적인 장면 후, 그 인물이(남명렬 분) 고향 원산에 살던 12살 소년인 홍성걸, 즉 자신에게로 돌아가 그와 대화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실제로 김학철은 죽어 원산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는데, 작가는 김학철의 염원에 상상력을 더하여 그가 연극의 시공간에서 되살아나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해설하는 것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제 김학철은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무대와 객석 사이에 존재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극 중 인물이 되기도 하고 관객들에게 설명도 해주는 경계의 인물이 된 것이다.
소년 홍성걸(김시유 분)은 문학적인 소양이 있으면서도 제국주의의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는 주체적인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열아홉의 나이에 스스로 결단하여 중국으로 향한 홍성걸은 동지들을 만나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며 의열 투쟁을 했고 활동명 김학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제1막 제4장에서 소년 홍성걸이 청년 김학철이 되어 황포군관학교 생활을 시작할 때 배우가 김시유에서 김세환으로 바뀌는 장면에서도 자유로운 극작술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노인 김학철, 소년 홍성걸 그리고 청년 김학철이 서로 웃으며 모여 있기도 하는데, 이 인물들로 인해 세 차원이 공존하는 창의적인 시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제1막 마지막 장은 김학철이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하며 동료들과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그리고 깊은 우애를 나누며 김원봉이 주축이 된 조선의용대의 창립 대원들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 등장인물들이 모여 조선의용대의 대열로 서고 창설 기념사진을 찍을 때 <최후의 결전>이라는 합창을 하며 관객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는 장면은 장관(壯觀)이다. 이 장면은 노인 김학철이 죽을 때까지 품에 간직하고 있었던 사진, 연극 휴식 시간과 마지막 장면에 무대 전면에 크게 투영되었던 한 장의 사진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바로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사진이다. 동시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인 사진인 것이다.
제2막은 조선의용대가 일본군과 교전을 하는 스펙터클한 전쟁 장면들과 김학철이 투옥되어 모진 고초를 당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조선의용대원들은 위험한 전쟁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며 의기양양하게 싸움을 이어간다. 제2막 형상화의 특징은 전쟁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노래를 많이 부른다는 것이다. 일본군과의 교전 중 그들의 전세를 약화시키기 위한 ‘함화공작’을 벌일 때 부르는 노래는 조선의용대의 고매한 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는 일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자들뿐이다! / 강제로 끌려온 일본 병사들은 우리의 진정한 벗이다! / 평화를 위해 총을 내려놓고 조선의용대를 찾아오십시오! / 우리는 인터내쇼날 동지들을 환영합니다!” 조선의용대는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것이지만 일본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지닌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일본군국주의의 희생양인 일본 징병군인들에 대해 연민의식을 드러낸다. 이들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은 전체주의와 식민주의를 타파하고 민중들이 주체적이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계였던 것이다.
다리에 깊은 부상을 입은 채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다 일본 패망 후 한쪽 다리를 잃은 채 살아 돌아온 김학철은 이름도 무덤도 잊히고 애도 받지 못한 동료들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왕현순, 윤세주, 진광화, 김학무, 류신, 마덕산 등을 위해 총 대신 펜으로 싸울 것을 맹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조선의용군 창설 기념사진과 ‘조선의용군 추도가’가 흘러 관객들은 이들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깊이 되새기게 된다.
의미가 큰 극이지만 제1막 유년기의 이야기들은 극작술적으로 좀 더 정리가 되어도 좋겠다. 김재엽 작가 겸 연출가는 제2부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북한과 중국을 떠돌며 소설가이자 역사 기록자로 실천적인 삶을 살았던 김학철의 삶을 조명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체제와 이념을 넘어서 민중들이 주체가 되는 평등한 삶을 추구했던 김학철의 실천적인 사유와 활동이 후속 무대로 구현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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