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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 이야기 본문

8면/연극비평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 이야기

Jen25 2024. 11. 8. 00:37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 이야기

- 연극 <생활의 비용>(마티나 마이옥 저, 정지수 번역/연출, 2024.10.22.~11.03. 미아리고개예술극장)

 

김향 (연극평론가, 호서대 교수)

 

연극 <생활의 비용>은 폴란드계 미국 여성 작가 마이옥 작품으로 2023년에 초연되어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이 작품은 미국 문화만의 유머나 어법 등으로 인한 문화적 이질감보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그들의 지극히 외로운 삶에 집중하게 되는, 그러면서 미국 자본주의가 개개인의 삶에 어떠한 균열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지 그 이면을 경험하게 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삶의 균열과 공포는 누구나 겪을 수 있고 지금 주변 누구가가 겪고 있을지 모른다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품인 것이다.

무대의 왼쪽 공간에는 박스들이 쌓여 있어 허름하고 정리 안 된 분위기를 경험하게 되며 오른쪽 공간에는 샤워기와 배수시설 등이 깔끔하게 갖춰져 있어 이 공간이 잘 꾸며진 욕실로 인식된다. 무대 정면에는 등장인물들이 들고날 수 있는 현관문이 있다. 사실적인 무대 장치를 설치했지만, 중앙 무대는 이야기 흐름에 따라 다른 장소로 상상할 여지가 있는 공간이다.

이 작품은 미국 뉴저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첫 장면은 재즈음악 효과와 더불어 브루클린의 힙한 장소의 하나인 세인트 마지(St. Mazie) (bar)에서 탄산수 한잔을 탁자에 둔 에디(김용준 분)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너스레를 떠는 행동으로 시작된다. 그는 관객들을 자신이 이야기 나누고 있는 상대로 설정하고, 관객들의 눈을 맞추며 독백을 한다. ‘우울한 소리를 하면 술 한잔 사기라는 규칙을 언급하며 자신이 자꾸 우울한 이야기를 하니 술을 사야겠다고 웃으며 말한다.

에디는 얼마 전 아내 안나(김은희 분)를 잃었고 지금은 실직 상태이다. 아내 없는 외로운 생활 중 유령의 장난인 듯 아내로부터 문자를 받고 이 바에 오게 되었다. 물론 이 문자는 명의가 바뀐 그 누군가로부터 잘못 온 문자였지만 에디는 홀린 듯 이 바에 왔다. 그리고 자신의 상실감과 외로움을 일면식이 없던 사람들에게 웃으면서털어놓고 있다. 비극적일 수 있는 사건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슬픔이나 절망감을 표현하기보다 마치 남의 일 이야기하듯 거리를 두고 표현하는 방식은 <생활의 비용>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적 표현 방법이다. 에디는 안나를 돌보는 과정에서도 그녀의 불행과 분노에 유머로 대응하며 웃음을 잃지 않는다.

에디와 안나는 21년 간 부부사이였으나 1년 전부터 별거를 하게 되었고 그 사이 안나는 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안나와 별거를 시작한 뒤 에디는 곧 다른 여자를 만나 살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안나는 이혼을 진행하려 했다. 그러던 중 안나의 간병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에디가 1주일 간 안나를 돌보게 되었고 이 시간 동안 이 둘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지만 안나는 갑작스러운 합병증으로 죽게 된다.

<생활의 비용>에는 에디와 안나 외에 또 다른 등장인물들 제스(이화정 분)와 존(황철호 분)이 등장한다. 존은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으로 일상생활에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존은 자신을 씻기고 단장시켜 줄 도우미로 제스라는 젊은 여인을 고용했다. 제스는 명문대를 갓 졸업한 25살의 젊은 여성이지만 정식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여러 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돈이 필요해 장애인을 돌보는 일도 하게 된 것이었다. 존은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이지만 부유한 청년으로 명문대 정치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교양 있고 지적인 인물이다. 존은 제스를 고용하는 순간부터 그녀와 대화를 하기 원하고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만 제스는 일상적인 사건 이외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는다. 제스는 미국으로 이주해 온 폴란드인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이주민 1세대로 현재 병을 얻어 본국으로 돌아간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심지어 자동차에서 거주하는 극도로 가난한 홈리스이다. 제스는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존에게 말할 수 없었고 다만 존의 교양 있는 품모와 그의 부유한 집을 동경할 뿐이었다.

<생활의 비용>의 시공간적 특징은 안나가 죽은 현재 시점을 중심으로 과거로 돌아갔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다. 각 막의 이야기는 시간의 변화에 따른 에피소딕한 장면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회상장면이 분절된 형태로 이어지는 형태다. 발단-전개-절정-결말이라는 잘 짜인 구조가 아니라 각 장면들이 에피소딕하게 나열되는 변형된 사실주의극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장면들은 두 커플들이 벌이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미세하게 변해가는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각 커플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듯했으나 결국 어긋나며 끝이 난다. 안나는 죽어버렸고 존은 제스의 바람과는 달리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안나를 돌보던 에디와 존을 돌보던 제스에게, 가난만큼이나 힘겨운 그리움과 외로움이라는 정서가 덧씌워지는 형상이었다.

마지막 장면은 서로 관계가 없는 듯했던 에디와 제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에디는 눈이 내리는 추운 날 히터 없이 차 안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제스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게 된다. 서로를 경계하며 어색해 하던 이들은 먹다 남은 피자와 오래된 커피를 서로에게 건네며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작한다. 외로운 이 둘의 만남은 또 다른 상부상조의 시작인 듯도 하다. 제시는 따뜻한 공간이 필요하고 에디는 자신의 공간을 통해 누군가를 도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관계를 남녀 관계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삼촌과 조카 정도의 관계일 듯싶다.

갑자기 접촉하거나 잡고 흔들거나 하면 난 그게 감당이 안돼요.(중략)누구한테 맞아본 적 있어요?(중략)내 몸 안에서. 누가 나를 때리는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 “나만 두고 나가면 안돼 욕조에- 나만 두고 가면 안돼-” / “그냥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엄마 보고 싶어. 엄마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미안해 엄마, 사랑해. 엄마 너무 보고 싶어.” / “난 그냥 - 사람이 필요해요. 그냥 누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위 대사들은 각각 존, 제스, 안나 그리고 에디가 말하는 것으로, 각 인물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내적/외적 고통 속에 놓여 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미국 사회의 구조적인 시스템의 문제와 장애인 및 이주민을 향한 고정관념과 차별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들이 신체적, 정서적으로 스러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 삶의 공포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그 이면의 사회구조적 문제를 유추하게 된다. 물론 결말의 새로운 관계맺음을 통해 연대의식이 삶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