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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원우칼럼

이름을 붙인 꿈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9. 4. 20:41

  이름을 붙인 꿈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석사과정 이지민

 

 동일한 공간 안,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길동무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얻은 보드카 마시고 쓰러져 자다 일어나서 본 새벽녘. 다시 봄인가라고 착각할 정도로 연분홍빛으로 물든 하늘과 구름 사이사이 스며드는 아침 햇살. 그 장면을 따로 또 같이 본 마샤와 아침 인사를 하며 새벽에 대한 감상을 나눴던 시간이 인화된 사진으로 남겨진 느낌. 

 마샤는 할아버지를 뵈러 사란스크로 향하던 중 같은 기차 칸에 탔다는 이유로 나의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물 마시고 싶었던 나를 위해 승무원에게 컵을 빌려서 내게 건네기도 하고 사란스크에 다다른 때에 맞춰 사람들을 깨워주기도 하고 그렇게 내 안의 사란스크 첫인상은 말간 미소의 소녀가 되었다. 

 기성의 모자란 성년들과 달리 바른 성년으로 잘 자라주기를 바라며 북극곰 인형 탈을 쓴 사람들이 반겨주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북극곰 인형 탈이 기후변화로 인해 야위어감을 표현한 건지 너무나 홀쭉해서 안쓰러우면서도 살풋 웃음이 났다.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영어로 무지한 관광객들에게 안내해주는 모습에도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 경기를 보러 오지 않았으면 평생 알지도 못할 도시인데 크게 낯설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이 먼저 눈에 띈 도시라서 인지 아니면 발길 닿았던 첫 가게에서 몇 년 전 내 최애곡 ‘Bailando’가 흘러나와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좋았다. 

 맑고 청명한 파란 하늘에 몽글몽글한 구름과 눈 부신 햇살의 조합만으로 행복 수치가 올라갔다. 정말 더운데 시원한 분수의 물방울을 미스트처럼 맞을 땐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심장을 치는 느낌이랄까. 사란스크라는 도시에서 느끼는 기쁨과 행복을 모아 내게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써내려간 엽서만 몇 장이었던지. 편지도 영감을 받을 때 더 잘 써진다는 걸 오롯이 느낀 귀중한 순간이었다. 

 식료품점에서 나와 한낮의 사란스크를 부유하다 보니 너무 더워서 눈앞에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돌진했다. 그리고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용맹하게 러시아어로 주문했는데 가게 주인 할머니께서 가게 문을 열고 나와 발음 교정도 해주시고 주문을 다시 확인해주셨다. 러시아 하면 막연하게 차가운 사람들이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정말 불필요한 선입견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반성하였다.  

 배가 출출하기도 하고 월드컵 기념상품을 얻을 겸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하는데 영어를 못 알아듣겠다며 난감해하는 직원과 그분을 보며 같이 난감해 하는 나 사이에 로컬 주민이 끼어들었다. 그분이 본인은 영어를 좀 한다며 직원과 나 사이에서 동시통역을 해주셔서 무사히 상품도 받고 햄버거도 받았다. 

 팬페스트 존으로 이동했는데 마침 러시아와 다른 나라의 경기라 로컬분들의 응원 열기는 대단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는 경기도 나름 매력이 있었는데 아마도 자국을 응원하는 사람을 관찰자의 시점으로 볼 수 있는 즐거움이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경기가 끝나고 살짝 차분해진 주변을 헤쳐 나와 바로 근처에 있는 유원지로 향했다. 도심의 면적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걸어서 이곳저곳 둘러보다 눈에 띈 그 유원지였다. 유원지에도 영어로 안내해주시는 자원봉사자분들이 계셨는데 할머님 한 분이 환영의 의미로 안아주셔서 사란스크는 내게 청명한 도시이자 따스한 도시가 되었다. 

 유원지 벤치에서 옷자락을 살랑이는 바람을 느끼다 잠이 들 것 같아 호다닥 일어나 경기장으로 향했다. 정말 보고 싶었던 선수를 결국엔 월드컵 경기에서 보게 된다는 사실에 심장이 심하게 뛰었지만 경기를 보기 전에 쓰러지고 싶지 않아서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정말 세계인의 축제답게 경기장으로 가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의 얼굴도 상기되어 있어서 더 축제같았다.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날 것 같은 인산인해의 현장은 좌석에 안착할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경기가 진행되는 거의 2시간은 꿈을 거니는 듯했다. 아니 사란스크에 도착할 때부터 이 도시와 작별 인사를 하는 내내 꿈속을 부유한 듯하다. 나의 푸르고 따스하며 사랑스러운 꿈, 사란스크. 여름이 다가올 때마다 꾸고 싶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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