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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미디어아트 석사과정 이서
대학을 졸업하는 동시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돈을 벌고 얼렁뚱땅 프로 작가가 되었다. ‘여전히 바쁘시죠?’라는 말로 안부를 듣는 게 당연한 사람이 이번에는 휴학까지 하고 작업에 더 집중해보고 싶다고 하니 앞으로의 목표나 차후 작품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작업이야 많지만 하나는 페인팅으로 전시를 하는 것, 다른 하나는 할머니에 관한 작업을 서른 전에 발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전자에 대해 나의 학부 전공이 회화인 것을 알고 쉽게 이해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추가적인 질문을 물어본다. 내가 할머니와 각별한지, 왜 하필 서른인지 등인데, 애틋한 기억은 전혀 없고 할머니는 7살 때 돌아가셨으며 나이에도 합당한 이유는 없다. 다만 서른이라는 나이가 내게는 어른이 되는 나이같아 그 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처음 미대에 입학해 많은 학생들이 그렇듯 나의 악하고 약함들, 혐오와 메마른 부위들에 대해 말을 쏟아냈고,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아닌 내 생각을 말해도 속이 답답하지 않을 때부터는 오히려 나를 작품이나 글로 드러내는 게 꺼려졌다. 피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이제는 겪었던 감정들에 유감이 없어서다. 그럼에도 이렇게 또 얘기를 써보는 것은 내가 지금처럼 유년의 서러움과 강박과 점점 멀어지다보면 더 이상 그쪽을 들춰볼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설명해보지 못하고 아무것이 아니게 될까봐, 나는 이 기억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지금 주변에도 가부장 사회 속 여성 같은 사람은 없다만, 듣기로 할머니는 더 유별났다. 요즘 시각으로 보기엔 소위 말하는 난년이다. 그 시대의 난년은 자식에게는 특히 상처가 됐을 것이다. 가정에 희생하는 일 외에 자기 것을 가지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고, 한껏 꾸미고 외출하기를 좋아하는, 내 감정에 충실하고 불행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십대 전부와 이십대 초반까지 나는 할머니와 멀어지기 위해 애썼다. 정확히는 할머니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 할머니, 내가 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가능성과 다름을 보여주려 했고 비슷한 모습이 나올까봐 막연히 겁을 먹었다. 우려하는 점들이 할머니의 모습인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럴 것처럼 보이는 모습들을 전부 제거하고 결백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자기부정의 원형이 할머니였음을 알았을 때부터는 계속 글을 썼다. 2018년, 2021년, 2022년의 글이 섞여있다.
“짙은 색의 립스틱, 몸 약한 모습, 남성들과 엮이는 것, 말을 하지 않고 짓는 고집스러운 표정, 마른 발등, 의욕 없는 데카당스, 본인을 최우선하는 천진함, 할머니를 닮아 아름다운 나를 통해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똑같은 내력으로 망가질까 염려하는 마음들”
“최근에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봤다. 허탈할 정도로 닮지 않았다. 곧이어 그러면 내 내면이 얼마나 닮았기에 사람들은 나에게서 할머니를 볼까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 했다. 일방적인 관계다. 나는 죽은 이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나만이 내 관계 속에서 할머니와의 관계를 만들어간다. 관계맺음을 당한다고 할 수 있다. … 이 관계를 전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무의식중에 피어난다. 내가 할머니를 긍정적으로 본다면 이해했지만 해소되지 못한 구김이 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할머니는 정작 태어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출생연원일과 성명란에 한자로도 병기가 되어있지 않고 비어있어요. 오로지 메모리얼로 떠다니는 사람 같아요. 죽었다기보다 사막 같거나 공중의 섬같이, 어딘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 같아요. 이를 테면 사람의 기억이 그 머릿속에 존재하는 공간이라면 그 안에 살 거 같아요. 그녀는 내 것이 아니고 어른들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응집물 같아서 하루는 그녀를 입을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할머니에 대해 생각하고 문자화한다는 것 자체로 크게 깨달음을 얻거나 나아진 점은 없었다. 다만 나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었고 충실하게 살았다. 그녀에 대한 재현들을 극복하거나 부정하지 않고도 내 자리와 내 것을 가져왔고 나라는 사람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도 나다워졌다. 내가 공부한 것들을 알고, 경제적으로 대부분 독립했고, 작업들을 이어가고, 나를 확신한다. 그래도, 여전히 미봉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겨나는 것과 더불어 필요하고 원하는 것은 그 원인조차 내 것으로 전유해올 수 있는 언어일 것이다. 내가 나의 말로 윤예한 씨를 갖게 될 때, 완결 지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휴학을 위한 면담 때, 지도교수님께서 불안은 젊음의 특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선 기분이 참 좋지 않았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고 넘겨짚는 말이겠거니 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인 말인데 자꾸만 맴돌고 부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원인 모를 불안의 존재조차 잊어버리는 것이 어른이기 때문이지 아닐까 싶다. 나는 어른이 되기 전에 그 격렬한 불안조차 내 말로써,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 고민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 또 하나의 욕구다. 이런 마음이 결코 죄되지 않다는 것을 믿게 해준 김명순 작가의 『생명의 과실』 창작집 머리말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 단편집短篇集을 오해誤解받아온 젊은 생명生命의 고통苦痛과 비탄悲歎과 저주詛呪의 여름으로 세상世上에 내노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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