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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원우칼럼

[꿀-정보Dream] 대학원생이 외부 장학금 받고 자기이해에 도달하기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4. 3. 13:12

동덕여자대학교 회화학과 석사 과정 한윤진

 

탁월한 미술가가 되려면 알바할 시간에 작업해야 한다고 떵떵 거렸던 그야말로 배불렀던 대학생은 코로나를 등에 업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팬데믹이 알려준 극강의 불안감은 대학원생을 일하게 했다. 조교의 첫 일과는 포털 공지사항 체크이다. 학부 때는 단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창에 들어가 교내에 무슨 일이 있나 확인한다. 그러면서 두 달 정도 떨떠름했다. ‘아니, 외부 장학금이 이렇게나 많았어?’ 무려 예술대학 등록금으로 실행한 부모님 등골 브레이킹 전적을 떠올리며 갱생을 다짐하고 공지를 챙겨봤다. 그러나 대상: 대학생이 얄궂은 글자는 어디에나 박혀있더랬다. 대학원생 지원해 주시는 분 어디 없을까요? 초록창까지 두들겨봐도 나 같은 일반 가정의 대학원생은 대상자가 되지 못했다. 재료값, 등록금, 생활비 걱정 속에서 2차 학기를 밟아가던 어느 날, 설정해둔지도 까먹고 있었던 토스 앱의 '숨은 장학금 찾기' 알림이 울렸다. '한윤진님에게 알맞은 장학금이 있어요!'

다소 코믹하게 마주한 <소나무 장학회>는 공익 가치 실현을 목적으로 청년들에게 학문을 장려하는 진지한 공동체다. 장학회의 비전에 동의하는 이들이 모여 윤리학을 매개로 개인의 삶과 공익적 삶의 교차 지점을 탐구하고 실천 방안을 모색한다. 공익이라는 거대한 탐구의 시작점에는 자기이해가 있다.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그것을 기준으로 자기 외부의 대상들과 상호작용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에 매몰된 채 자기 파괴적인 시간을 오래 지속했다. 덕분에 자기 이해나 자기보존 같은 개념은 참으로 생경했던 나머지 7개월 동안 혼란의 공부를 했다. 혼란과 인식의 반복이 고통이었음에도 물음에 애썼다. 미술과 세상을 제대로 알고 싶은데, 정작 나를 몰라서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아서 그랬다. 더불어 자기 이해에 파고드는 일은 결국 삶의 근본적 물음을 갖도록 이끈다. 가령 존재처럼 거창한 듯 보이나 모두의 공통분모인 관념에 대한 물음 속으로 말이다.

최근 모임에서는 물리학자 장회익 선생님의 온생명global life 개념을 공부한 토대로 발표를 했다. 그는 자유에너지가 생명 현상에 필수 요건임에 주목하여 생명의 단위를 자족적, 조건적으로 구분하고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새로운 대답을 내놓았다. 온생명은 자족적 생명이자 그 자체로 전일적 실체인 생명 개념이다. 이것은 태양을 포함한 지구 생태계에 나타난 모든 생명 현상의 긴밀한 연결성을 하나의 유기적 체계로 이해한다. 반면 불가피하게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얻는 조건적 생명은 낱생명individual life이라 부른다. 이것은 살아있다고 인식하는 개체 생명체를 뜻한다. 이때 낱생명들이 에너지를 얻는 외부는 바로 보생명co-life이며 이는 생존에 필수적인 자연적 바탕이라 이해할 수 있다. 온생명론에 따르면 인간과 환경은 온생명의 질서 속 같은 층위에서 긴밀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이점에 주목하여 생명을 이해하면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이유를 포괄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바탕 구도의 인식은 삶의 태도에 관한 환기를 줄 것이다. 전체의 일부를 자기 자신이라 여기는 것과 내 신체를 자신이라 여기는 것의 차이는 인간의 본질을 달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적 관점에서의 존재 분리와 생명 개념은 내가 딛고 서있는 바탕을 인식시켜주었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모험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먼 과거에 있다.”라고 말씀하셨듯, 자기 자신을 알려면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떻게 서있으며 무엇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호흡하고 있는지 인식하는 것이 앎의 첫 단추임을 깨달았다. 우리 각자는 무수히 먼 과거에서부터 도래한 모든 생명들의 긴밀한 연결로써 형성된 존재이자 앞으로 등장할 무한한 생명들에게 영향을 줄 낱생명이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단순히 개체성을 띠는 자신의 삶이 정해지는 동시에 다음 존재들의 경로와 변이가 정해진다. 다시 말해 생명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지어나가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우리 각자의 영향은 이 땅에 영구히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지어나가느냐에 따라 그것이 선으로 지속할지, 악으로 남을지 달리 되는 것뿐이다. 이로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사유가 도출된다. 따라서 삶에 관한 올바른 숙고의 축적은 모든 생명이 같은 바탕 구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상호 순환함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온생명에 감응하고 나니 존재 간의 얽힘에 대한 일종의 책임과 사명을 느낀다. 동시에 현재 우리의 바탕에서는 무자비하게 일어나는 폭격과 피난 그리고 폐허의 이미지가 도래한다. 나의 망막에는 혐오 정치의 휘둘린 이들이 결집한 장면과 a.m.4:00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이 교차하여 맺힌다. 우리는 아직 상호 영향의 관계를 명징하게 합의하지 못한 탓일까. 혹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이들이 아직 너무나도 많기 때문일까. 잠깐의 허무함을 체험하고는 그 속에서 빠르게 벗어나 생명의 대안적 관념을 인식해 냈다는 사실을 다시금 들여다본다. 온생명이 선사한 삶에 관한 작은 뜨거움, 그 온도로부터 다시금 온생명 안의 나를 살아내고자 다짐해 본다. 혼란과 인식을 축적해서 사유로 승화시킨 나날을 돌아보며, 내가 다시 '배부른 대학원생'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함께 호흡해 준 낱생명들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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