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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길고 유연하게 본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조수아
몇 년 전 가을, 일본 근대문학관에 간 적이 있었다. 때마침 모리 오가이(森鴎外) 특집이었고 나는 중학생들 틈에 섞여 작품의 원본과 편지지 같은 것들을 관람했다. 일본어로 된 설명을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내게 무언가가 전해져 오기를 기대하면서 계속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모리 오가이의 생애나 그의 작품 <무희>가 어떤 작품인지에 대한 것보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이랄까, 그런 것들이었다. 가장 처음의 도쿄부터, 세 번째의 도쿄, 네 번째, 다섯 번 째……. 이제는 방문 횟수를 세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이 도시에서, 모리 오가이라는 작가의 손글씨를 보게 된 순간까지. 지금까지의 이동경로가 하나의 그래프처럼 느껴졌다. 결코 평면적일 수 없지만 평면적인 방식으로, 아주 단순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문학관이라는 곳 자체가 그러한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삶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둔 곳. 그가 어디에 머물렀고 어디로 이동했는지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을 기록해둔 곳. 그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은 그곳에 쓰여 있지 않다. 그곳을 찾은 우리들이 추측해야만 한다. 누군가의 생애 그래프와 같은 공간을 곳곳이 살펴보면, 놀랍게도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을 읽는 일과 어느 정도 닮아 있지 않나. 가만히 그 공간 속에 머물러 보는 것. 나는 그것이 꽤나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학원생이 되었을까.
지금은 대학원에 오길 잘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처음 입학했을 때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공부에 대한 불타는 열의로 직장을 그만두고 왔거나, 몇 달 동안 입학 준비를 했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함께 입학한 원우분들의 열정 넘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들에 비해 나는 별다른 뜻 없이 대학원에 왔기에. 나는 그저 대학원에 가면 계속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럴 명분이 생기는 것 같아서 진학을 결심했던 것뿐이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고 이후의 계획도 잘 몰랐다. 이렇게 막연하게 대학원에 온 나 같은 사람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나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준 것은 선배들이었다. 발제문을 쓰는 방법도, 1차 자료라는 것을 어떻게 찾는지도 잘 몰라서 헤맸던 내게 손을 내밀어 주고, 내가 관심 있는 주제와 나의 글에 대해서도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그랬어’라는 말이 그때는 왜 그렇게 힘이 되었는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주면서 지금의 나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그들이 정말 고마웠다. 선배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3학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다 그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같이 공부하자는 말들은 지금도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기언니가 있기에 나는 척박한 이 대학원 생활을 버틸 수 있던 것 같다. 사실 앞으로 더 많은 날들이 남아 있지만. 괜찮지 않을까.
<토지>를 쓴 작가 박경리는 ‘행복했다면 문학을 껴안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신경이 정지된 듯했다. 그 말이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슬펐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거창한 말이지만, 내가 문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도 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문학을 붙잡는 것 같다. 그것이 까마득한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되더라도, 때때로 폄하당하더라도 나에게는 아니다. 아마 나와 함께 공부하는 이들 모두가 그러지 않을까 싶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옆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대학원에 와서 그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맥락을 훌쩍 뛰어넘고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한다. 예컨대 어제 읽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케이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게 가능해진다. 세상에 그런 관계가 얼마나 존재할까.
얼마 전에는 동기언니와 멀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전 국민 백신 접종률이 70퍼센트를 웃돌고, 거리두기도 점점 완화되면 이전의 삶으로 곧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돌아갈 수 있을까. 사실 코로나 이전의 일들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 마스크를 벗고 비행기를 타는 날이 온다면 이제는 위화감이 들 것 같다. 불과 이년 전이지만 한 시대를 건너온 듯하다. 그만큼 아득하다. 그럼에도 그런 날이 온다면 좋겠지. 만남에 제약이 없었고 감염 위험이라는 것도 생소했던 이전 시대. 전날 새벽에 티켓을 끊고 바로 다음 날 출국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그 시대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지만 그때가 되면 언니와 다시 근대문학관에 가 보고 싶다. 설령 그때로 완전히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지금처럼, 이 자리에서 우리의 일을 할 텐데.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여느 때처럼 같이 머리를 싸매고 글을 쓰고, 소설을 읽으면서 가끔 무언가가 해소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그 마음을 나누고, 다시 받고, 또 다시 쓰고.
훗날 이 대학원 생활도 내 생애 그래프의 한 점, 혹은 그 이상을 차지하겠지. 몇 개의 점은 계속 연결되면서 언제까지고 길어질 것이다. 그러다가 다른 변화로 인해 흐려지기도, 끊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작은 점으로 지금 이 시간들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내 삶 속에서 제외시킬 수 없는 이 시간을 더욱 길고 오래도록 늘어놓고 싶다. 그럴 수 있기를. 나는 항상 그것만을 바란다. 여전히 저 대학원 도서관에는 불이 켜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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