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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침묵을 감득하는 법 본문
침묵을 감득하는 법
국어국문학과 석사수료 윤희상
선생님, 어느 날은 모든 순간이 전장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옴짝달싹 못 하는 시간이 늘어갑니다. 저는 무엇과 싸우는지 한참을 골몰하다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고 되뇝니다. 마음의 기둥이신 복수(複數)의 선생님, 마음의 빗장을 열면 거기엔 침묵을 후퇴시키는 ‘말들의 과도함’을 견딜 수 없는 제가 있습니다. 블랑쇼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하는 공허” 속에서 위세를 부리는, 말을 통해 말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말하기에 장악되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을 말하지 못합니다. 이때의 침묵이란 결국 침묵이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의 귀에는 언제나 자신의 삶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죽은 자들의 번잡스러운 웅얼거림이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수다쟁이는 귓가에서 맴도는 잡음을 들리지 않는 것으로 처리해버리고 맙니다. 그 수법은 대개 차별, 혐오, 배제의 외피를 띠게 되지만 종국에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실패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선생님, 저는 이 이야기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요. 저는 얼마만큼 무죄일까요.
일전에 랑시에르는 우리에게 “우리는 죽었고, 아직도 말을 더듬나니 Nous somme morts, bégayant encore”라는 구절을 들려주었습니다. 말을 더듬기 때문에 죽고만, 혹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말을 더듬는 사람들. 『역사의 이름들』에서 소개된 이 구절은, 공화주의적 역사가 어떻게 창설되었는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급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제 눈길을 끈 건-부적절한 표현이 있지만 번역본을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랑시에르가 “자리 없는 목소리는 벙어리 증인의 목소리로 구제된다”고 한 대목이었습니다. 요컨대 죽고 나서도 말을 더듬는 자들의 묘지 앞을, 말 못하는 자들이 지키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조우해야 하는 것, 우리가 감득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그 증인들의 목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어도 죽은 게 아닌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이곳과 저곳을 메워갑니다. 죽음에 대한 방관과 무지는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미 죽은 자들이 여전히 남기고 있는 목소리, 산 자들의 목소리보다 더 선명한 그 목소리를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묘지를 지키는 “벙어리 증인” 곁으로 다가서는 것, 그것이 최초의 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이 다시 제게 돌아옵니다. 저는 모두의 말이 어떤 자리와 의미를 가졌노라고 상정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 안의 말들만이 살아남게 만드는 방식은 결국 어떤 말하기가 영원히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음을 간과하기 때문이지요. 주저함의 끝에서 저는 상투적인 다짐으로 입술을 간질입니다. 나를 나 아닌 곳에서 바라보자. 자리의 배치와 층위를 알자. 저는 새삼 어느 중간 지대를 향해 손을 뻗습니다. 사랑과 평화의 수사만 있다면 뭐든 아름답게 끝날 거라는, 파시즘의 소산일 기만적인 ‘명랑함’에의 맹목을 상대화하되, 완전무결한 피해자일 ‘나’를 창조하기 위한 ‘무균실’의 공허한 폭력 또한 경계하는, 그러한 중간 지대 말입니다. 그렇게 오래 머물 수 없는 곳에 안주하는 제 자신이 싫어질 때 즈음, 저는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고 계신 선생님. 현재진행의 믿음을 제게 주시는 선생님. 제 역사에 남은, 또 앞으로의 역사를 함께 쓸 당신들이 모두 읽고 쓰는 삶을 영위하는 여성이란 사실은 우연에 불과할까요. 엘프리데 옐리네크를 위시하여 여성이 욕망하는 방식을 알려주신 선생님. 정치적 올바름의 역사적 의의와 더불어 ‘무균실’의 위험성을 가르쳐주신 선생님. 동일본대진재를 비롯해 수많은 재해 속 버려진 자들의 삶을 목도하게 해주신 선생님. 3.1운동 속 무명씨들의 밤을 비추면서 동시에 세계(문학)의 낮과 밤으로의 확장을 가늠하게 해주신 선생님. 당신께서 울고 웃으며 나눠주신 마음들이 반드시 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아닐지라도, 저는 암암리에 (문학적) 읽기를 통해 저 어찌할 수 없음을 상대하는 방법을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자리 없는 말들, 들리지 않는 말들과 조우하는 방식으로써 읽기를 말한다는 게, ‘배운 사람’의 김빠지는 탁상공론에 불과할는지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는 게 이뿐이라, 결국 더 무책임한 방식을 택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인류애를 품고 박애의 마음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저는 우선 제가 할 수 있는 최전선의 침묵을 감득하고자 합니다.
‘이상한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싶습니다. 모호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두는 연습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경계 짓기’를 자연화하지 않는 연습을 하고 싶습니다. 문학은 어찌 되었든 제게 그런 연습을 가능케 해줍니다. 불온하고, 불편하고, 불쾌하고, 불친절한……순간들과 더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러한 이질적 만남의 순간 속에서 저는 한 명의 증인이 됩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뜻하는 바를 충분히 빨리 알지 못했기에”(랑시에르)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지키는 증인이 됩니다. 식민주의를, 인종주의를, 자본주의를…그리고 끝내 나 자신을 상대화시킬 수 있을 때까지, 안주하지 않으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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