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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계약: 완전한 희생과 평화에의 약속 본문

5면/문학의 향기

계약: 완전한 희생과 평화에의 약속

알 수 없는 사용자 2025. 9. 19. 13:58

 계약: 완전한 희생과 평화에의 약속

-어슐러 르 귄, 최용준 옮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바람의 열두 방향, 시공사, 2014.)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최근 한 지면에서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는 애니메이션 <도로로>(2019)를 언급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그 존재를 귀신의 희생양으로 바치고 나라의 평화를 약속받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에서,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을 빼앗긴 햣키마루(百鬼丸)’는 최소한의 육체와 정신만이 남아 있는 상태로 자신의 몸을 빼앗아 간 귀신과 대결하며 자신의 몸과 감각을 되찾으려 한다. 영토 싸움이 있을 때마다 쫓기고 죽임당하는 데 이골이 난 평범한 사람들은 햣키마루를 동정하면서도 그가 운명을 받아들이길 원한다. 햣키마루 단 한 사람의 완전한 희생으로 다이고 영토에 평화를 기원하자는 것이다.

이 다수의 희망은 물론 옳지 않다. 그 자신들조차 무의미한 영토 싸움에 휘둘린 채 살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한 명의 완전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택의 상황 자체는 단순하지 않다. 이것은 과연 다수의 행복단 한 명의 희생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일까? 핵심은 이러한 규범의 창출 그 자체에 있다. 살기 위해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도록 만드는 규범. 사실 한 명의 확실한 희생과 그에 대한 동조는 권력자의 욕망에 의해 발생했지만, 다수의 선택이라는 환상 뒤로 은폐된다.

실로 이러한 상황의 진실은 한 명의 희생과 다수의 묵인이 모두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규범의 환상을 만들어낸 자의 절대적 안위 보장에 바쳐진다는 데 있다. ‘다수 vs 개인이라는 양자택일의 생존 전쟁에서 승자는 오직 그러한 구도를 통해서만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게 만든 바로 그 단 사람, 다수의 피치 못할 선택을 등에 업고 자신의 과오를 정당화하는 것이 이와 같은 구도의 핵심이다.

개인 vs 다수의 가치를 저울질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더 나은선택이란 없다. 시선을 개인의 도덕적 선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적 폭력으로 돌려야 한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기실 많은 문학 작품에서 또한 발견된다.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도 그렇거니와, 작가가 해당 작품에 대한 노트에서 밝히듯, ‘속죄양모티프는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품에서 또한 등장한 바 있다. 확실한 희생을 통해 완전한 평화와 낙원을 희구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문제의식은, 인간이 이상적 낙원의 구성 요소에 반드시 약자에 대한 절대적 희생을 거래의 요소로 두고 있다는 함정에 주목한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바다에 세워진 도시 오멜라스의 여름 축제 장면에서 시작된다. 쾌활한 아이들 평온한 노인의 모습은 이 도시가 얼마나 평화로워 보이는지를 일러준다. 오멜라스에 대해 좀 더 초월적인 위치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서술자 는 오멜라스의 평화로운 풍경에 숨겨진 어떤 것을 폭로하려던 참이다.

오멜라스의 한 공공건물에는 지하실 방이 있다. 그곳에는 창문도 없다. 먼지투성이에, 온갖 잡다한 것들이 들어 차 있는 매우 불쾌한 공간이다. 그곳에 어린 아이 한 명이 있다. 그 아이는 언제부턴가 거기에 있었고, 그 아이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오멜라스의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 그 아이는 살려달라고 애걸하거나 말을 잃고 멍하니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며 이윽고 등을 돌려 그곳에서 돌아 나온다.

중요한 것은 방문객을 포함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오멜라스의 사람들이 그 아이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고, 때때로 구경하거나 그 사실을 확인하러 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이 맞닥뜨리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 아이가 그렇게 비참한 상태에 있어야만 자신들의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이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이를 구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이를 구하지 않고 방치해야만 그들의 행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사소한 개선을 위해 오멜라스에 사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멋지고 고상한 삶을 맞바꾸어야만 한다는 것, 한 사람이 행복해질 기회를 얻기 위해 수천 명의 행복을 내던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하실 골방 안에서 벌어지는 죄악을 방기하게 만드는 이유다계약은 엄격하며 절대적이다. 그 아이에게는 친절한 말 한 마디조차 건네면 안 된다. (456)

 

이 절대적 계약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한 명의 절대적인 절망에 모두가 동조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평화를 과연 평화라고 할 수 있는가? 때때로 폭력에 저항하는 혁명의 시간을 거치면서 인간은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이르는 만인의 평화라는 이상에 도달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더라도 그 어려운 것을 해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폭력이 보다 효율적이고 쉬워보이는 선택을 선보임으로써 계약의 조건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제안함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희생을 담보하여 이르는 이상이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며 그에 저항한다. 소설 속 어떤 사람들도 그렇다.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떠난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는 그 도시의 행복과 평화를 누리지 않는다.

일찍이 서술자는 고통을 낭만화하는 궤변을 지적하면서 절망을 찬양하는 행위는 기쁨을 비난하는 행위이며, 폭력을 용인하는 행위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행위라고 단언한다. ‘로 지칭됨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초월적 위치에 놓인 서술자를 통해 오멜라스를 말하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오멜라스에 동의하는 자가 아니지만 오멜라스가 있는 세계에 속한 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선택한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전달한다. 우리 또한 그와 같은 세계를 거부할 수 있고 멀어질 수 있음을 그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