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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이야기의 기원(祈願) 본문

5면/문학의 향기

이야기의 기원(祈願)

Jen25 2025. 4. 7. 13:15

이야기의 기원(祈願)

-윤성희, 마법사들(느리게 가는 마음, 창비, 2025)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그래서 이번에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소설마다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친구를 한 명씩 등장시켜주자고. 괜찮다. 괜찮다. 그렇게 말해주니 소설 쓰기에 자신감이 사라지는 날이 와도 진짜 괜찮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을 쓸 때는 인물들에게 작은 파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생일이 나옵니다. (<작가의 말> 262)

 

  윤성희 작가는 소설을 쓰기가 막막할 때마다 웃는 장면을 그렸다고 한다. 웃는 장면의 효력이 다해갈 즈음엔 괜찮다는 말을 쓰는 인물을 등장시켰고, 이번 소설집에는 무언가를 축하해주는 인물을 그렸다고 한다. 모여 축하를 나눈 인물들은 정말로 축하받을, 축하할 일이 있었을까? 작가의 말을 다시 읽어보건대 축하에 대한 묘사는 소설적 상황에서의 사후적인 반응이라기 보다는 기원(祈願)의 성격을 더 크게 지니는 듯하다. 축하하고 축하받는 이야기의 한 장면은 소설 속 상황이 그럴 만해서 그렇게 그려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방식은 현실에 대한 주술적 효과를 지니는 듯하다. 우리는 소설에서 우리의 현실과 꼭 닮은 모습을 보기 때문에 이야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소설이 약간 앞서 그것을 성취하고 있음을 보면서 그 미래를 마음에 품는다. 물론 그렇다곤 해도 소설적 현실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고,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읽기 전과 후의 현실도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변화하지 않은 현실이 굳건하게 시간을 관통하는 동안 변화한 것이 있다면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한 인물과, 그 인물의 이야기를 읽는 우리 자신의 태도일 것이다.

   꽤 무력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만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한 가지가 달라졌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달라짐을 뜻한다. 우리 자신이 믿고 있는 온전한 하나의 상()에 대한 집념을 내려놓을 때, 내가 다르게 행동함을 알게 될 때 그다음부터 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이해는 다시 정립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현실의 무언가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주술적 언어를 읽고 선행적으로 무언가를 축하한다면, 그 축하할 만한 미래를 근미래로 당겨올 수 있을 자신을 선행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축하될 미래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조금은 과장된 해석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소설적 죽음을 통해 우리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는, 즉 현실의 경험을 초월한 이야기의 묘사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성찰할 수 있다는 진실에 대해서는 익히 벤야민을 통해 제시된 바 있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지난 12월 이래 가중된 내란의 혼란을 매일 마주하고 있는 우리가 염불 외듯 매일 안팎으로 외치는 대통령 탄핵 그리고 평화롭고 민주적인 삶에 대한 회복이, 결코 무력하게 흩어지는 말이 아니라고, 우리가 당도할 미래에 조금 더 먼저 도달해있는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체험하고 있다.

 

*

 

   윤성희의 소설 마법사들애씀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두 10대 청소년의 가출(?)을 주된 사건으로 다루지만, 이들이 지금 이 가출에 이르게 되기까지 경험했던 수많은 좌절과 고통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불행에 대한 애씀의 흔적을 잔잔하게 추적하는 모든 과정을 수반한다. 가령 는 부모 몰래 차를 끌고 나온 고등학생에 의해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엄마가 담근 김치가 다 떨어질 때까지 참치김치볶음밥만 해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곤란한 질문 앞에서 휘파람을 불곤 하는 성규는 오늘 생일 쿠폰을 쓰겠다며 에게 가출을 같이 해달라고 요청한다. 가출길에 오른 두 사람은 버스 기사에게 생일 축하를 받기도 하지만, 이름 모를 구멍가게에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과자를 사먹기도 한다. 한 극장에 당도한 그들은 영화관에서 몰래 밤을 새우기로 하고 관객이 거의 없는 지루한 영화를 선택한다. 영화에서는 애쓴다는 말을 오십육 번이나 하는 할머니가 나왔고, 그들은 영화 속에서 국숫집을 운영하는 할머니가 멱살잡이를 하는 할아버지 손님에게 싸우느라 애썼다고. 늙느라 애썼다고말하는 장면을 상기한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애씀에 대해 생각한다. 성규는 유년기 집이 어려워져 보육원에 가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약속보다는 늦었지만 자신을 찾으러 온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떠올린다. 성규는 자신의 외로움과 불안함을 누군가의 부러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덮으며, 버려질 수도 있었다는 상처받은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는 중이다. ‘역시 마찬가지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으로 발끝을 세우고 걸었던 를 위해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주말마다 아버지와 바닷가 야영을 다닌다. 아버지와 일출을 보던 어느 날 는 마침내 발끝이 바닥에 내려와 있음을 느낀다. 가족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을 이겨내려는 이들의 애씀이 어느 순간 마주침으로써 서로를 삶 쪽으로 당긴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는 모두가 저마다의 절망이나 고통을 달래며 애쓰고 살아가고 있음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한다. 애써야 함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닥친 불가해한 고통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애쓰는 중이라고 말이다. 그 여느 때보다 많은 이들이 안팎으로 애쓰는 지금, 현실을 바로잡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온전히 위로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민주적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바로 그 애씀의 결과가 지금의 현실보다 아주 약간만 더 앞서 있음을 나는 애씀의 현실에서도, 이 이야기에서도 본다. 이 이야기에 대한 소개가 우리에게 당도할 미래에 먼저 도착한 애씀에 대한 위로이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