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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여자는 왜 식물이 되는가 본문
여자는 왜 식물이 되는가
(한강, 『내 여자의 열매』, 문학과지성사, 2018)
어떤 소설은 그것을 읽는 첫 순간 정확하게 언어화되지 못하고 감각적으로 어긋나있다가 훗날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읽힌다. 내겐 그런 결을 지닌 작품들이 몇 있다. 그러한 작품들을 적지 않은 시간, 몇 년의 격차를 두고 다시 마주하고서야 시간이 지나야만 알게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한강의 잘 알려진 소설 <내 여자의 열매>를 처음 읽었던 것은 2010년대 초반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펼친 소설의 문장을 마주하면서 과거의 내가 과연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지 매우 미심쩍었다.
이 소설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사물이 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내 여자의 열매』를 한 여성이 나무가 되어버리는 이야기라고 기억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한강의 소설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모자가 되어버리는 황정은의 『모자』와 같은 소설을 공교롭게도 함께 읽어나가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공간을 살아가던 인물이 느닷없이 식물이나 모자가 되어버리는 이야기는, 소위 ‘리얼리즘’의 문법으로 창작된 소설을 일반적 규범의 소설로서 학습해가던 입장에서는 조금 이상하고 낯선 것이었다. 소설이 현실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재구성이라는 것이 현실과 허구를 이 정도로 넘나드는 것까지를 포함할 수도 있는 걸까? 이러한 물음은 소설이냐 아니냐를 따져묻기 위함이 아니었다. 내가 읽어온 독서 경험 속에서 현대인이 사물로 변화하는 것은 완전한 SF로 생각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한 리얼리즘이라고 판단내릴 수도 없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로 읽혔다는 점에서 낯설고 매혹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소설을 마주했을 때, 독자가 가지게 되는 일차적인 질문은 ‘왜 그 사물이 되는가’다. 소설이 허구적 장치이자 현실을 재구성/재해석하여 창조된 세계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사물이 되는 것의 가능/불가능성을 따지는 것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왜 ‘그 사물’이 되는가의 문제는 중요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가 아니라 다름 아닌 ‘그것’이 되는 이유에 대해 작품과 읽는 사람이 조응할 수 있느냐는 문제인 것이다.
『내 여자의 열매』를 한 여성이 열매가 맺히는 나무가 되는 이야기라고 요약해도 틀릴 것은 없다. 그런데 이 요약이 곧 주제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형상화를 통해 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 내용은 사람이 나무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한 여성이 식물이 된다는 사실은 곧 한 존재를 억압하는 일상화된 폭력의 세계에서 그 존재가 타인의 시선에 복종되었던 대상이 자신을 타자화했던 어떤 이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주체가 되는 쪽으로 변모하는 ‘대상화’의 역설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것이 ‘왜 그 사물이 되는가’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그런데 이 주제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 이르는 소설의 전개 과정과 형상화 방식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 소설은 식물이 되는 그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지만, 그녀의 발화 비중을 아주 일부로만 할애한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아내’로 지칭된다. 그리고 바로 그녀를 ‘아내’라 부르는 사람, 즉 그녀의 남편이 이 서사의 주된 화자다. 이 소설은 남편의 시선에서 관찰되는 ‘아내’인 여성 인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누구의 시선에서 사건이 묘사되느냐의 문제는 특정한 상황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상황 혹은 사건 자체에서 주목되는 인물이 화자 자신이 아닌 경우 간접적인 시선을 중개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중개자’를 자처한다고 해서 화자 자신의 판단이나 태도가 결코 뒤로 물러서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강의 이 소설에서는 그렇다. 자신의 아내가 식물이 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남편의 신념, 성격, 기억, 판단의 행위 등 그의 시선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그가 결코 아내의 식물 됨이라는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장치다. 독자는 남편의 시선을 투과해서 아내에 대한 정보를 얻고 또 상황을 바라보게 되지만, 그렇다는 사실이 남편의 시선에 동화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령 점점 푸르스름한 멍이 커져 가는 아내의 몸을 보면서 그가 떠올리는 것은 오직 아름답고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서의 몸이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아내의 몸에 얼마나 탄복했는지, 그것이 자신을 얼마나 감미롭게 했는지 자꾸만 반추한다. 멍이 커져가는 가족의 몸을 바라보며 그런 것을 떠올리는 남편을 보고 독자는 느낀다. 그와 같은 미감에 대한 것이 아니라, 푸른 멍을 보고 육체의 미를 떠올리는 동거인의 그로테스크함을.
아마 그는 앞으로도 평생 모를, 여자가 식물이 되어버린 까닭을 소설은 두 부분에서 제시한다. 과거, 아파트에 살고 싶지 않다고 강력히 의사를 표명하는 아내의 얼굴에 손에 받아두었던 빗물을 끼얹으며 모욕했던 장면은, 소설의 후반부에 몸의 거의 모든 부분이 식물화된 아내의 머리에 물을 끼얹는 장면과 겹쳐진다. 물을 끼얹은 “번득이는 초록빛 몸”을 본 남자는 “내 아내가 저만큼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은 성욕에 기반하여 여성의 육체에 보내는 여전한 그의 시선에 걸쳐져 있는 동시에 더는 그러한 그의 욕구와 요구에 기준하여 드러나지 않는 (비)여성 존재(식물)의 아름다움, 즉 그 자신이 소유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하나 정작 자신은 알아채지 못할) 경탄이다. ‘아내’로서의 여자는 자신의 얼굴에 물이 쏟아졌을 때 모욕감을 느낀다. ‘아내’는 빗물이 얼굴에 쏟아지기를 원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물은 물을 원한다. 거의 식물이 되어가는 아내는 물을 ‘요구한다.’ 욕망의 대상이었던 존재가 욕망을 지시하는 존재가 되는 서사. 이것이 ‘(내 여자)그녀’가 식물이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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