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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을 배반하는 또 다른 방법 본문
‘모성’을 배반하는 또 다른 방법
-백온유, 「반의반의 반」, 『Axt』 2024년 5·6월호
구체적인 관계로서 어머니와 딸을 마주하는 것과, 관념적으로 그러한 ‘표상’을 상상하고 그에 대한 기대치를 만들어가는 일은 전혀 다르다. 가부장 중심의 사회에서 어머니는 온화하고 다정하며 가정에 희생하는 것을 ‘어머니’ 역할의 최대 덕목으로 여기는 표상으로 상상될 수 있지만, 실제 어머니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단, 실재하는 것과 표상 사이에는 영향 관계가 성립한다. 실재 어머니는 사회가 요구하는 ‘표상’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고 의식적으로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즉 표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실재냐 표상이냐가 아니라, 관념적 표상이 실재하는 것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에 있다.
백온유의 소설은 이 지점을 비틀어낸다. 소설에는 현진, 윤미, 영실의 삼대 여성이 등장한다. 소설은 이 가운데 영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실은 현진의 조모이자 윤미의 모친이다. 영실은 수려한 외모를 지녔고 자신의 가정에 헌신하되 남들이 바라는 방식이 아닌 자신의 기준 위에서 그래왔다. 최근, 그런 그녀에게 미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현실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바로 노화다. 자기의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딸과 손녀에게 의지하게 될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영실은 비밀리에 실버 타운에 들어갈 결심을 굳힌다.
한편 윤미의 관점에서 영실은 감히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존재다. 윤미는 대학 시절 딸 현진을 임신하는 바람에 졸업을 포기하고 결혼했고, 현진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동창과 불륜을 저질러 유책 배우자로 이혼당했다. 이후 동창의 아내에게 간통죄로 고소를 당해 합의금 삼천만 원을 요구받지만 어머니로부터 그 돈을 빌리지 못해 실형을 살기도 했다. 그녀가 이런 수난을 겪는 동안 어머니는 그녀를 엄정하게 대했으며 그녀는 그러한 어머니의 결정에 충실히 따랐다. 그녀 자신이 이미 어머니의 기대치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머니의 수려한 외모와 단호한 행동거지에 경외감을 느끼는 자녀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에게 저항하거나 불복하는 자녀는 아닐지라도 내심 서운함을 느낀다. 한날 영실이 수술 후유증으로 섬망증세를 호소하자 그녀를 돌보게 된 윤미는 전과 달리 쇠약해지고 무력해진 육체를 가진 노인이 된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한다. 윤미에게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은 그녀의 노화와 함께 어떤 반발심과 혐오감을 동반하기 시작한다.
손녀인 현진에게 할머니 영실은 분명 다감한 존재가 아니라고 단언된다. 그러나 그녀는 당당하고 교양있는 여성상이다. 현진이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학생과 싸우고 난 뒤 부모님을 소환해야만 했을 때, 자리를 비운 윤미 대신 영실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복식을 갖춰 학교에 당도했다. 그녀는 안하무인으로 구는 상대 어머니를 앞에 두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조목조목 상황을 파악한 뒤 응당한 사과와 피해 보상까지 받아낸다. 현진에게 영실은 살갑지는 않으나 자랑스럽고 멋진, 그러나 노화가 진행된 이후 조금은 괴팍해진 사람이다.
이들이 영실의 삶을 둘러싸고 할머니 혹은 어머니로서 가지고 있는 일종의 표상화된 이미지와 실제 그들이 관계 맺음하면서 목도하는 ‘영실’이라는 할머니이자 어머니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떤 측면에서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동시에 기대를 충족하지 않은 존재였다는 사실이 (특히) 자녀된 관점에서 얼마나 고갈된 애정을 갈구하게 하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소설은 이러한 불일치하는 입체성을 조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소설은 어떤 사건을 경유하여 약간의 ‘배반’을 시도한다. 노화 탓에 스스로 몸을 돌볼 수도, 기억력이 전만 못하다는 생각에 점점 괴팍해지는 영실은 현진과 윤미에게 완전하게 신뢰할 수는 없는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그런 중에 영실이 장롱에 오천만 원을 숨겨두었으며, 그것을 분실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용의자는 벌써 2년째 이 집에 드나드는 요양보호사 이수경이다. 이수경은 조사를 거부하지만 정황상 그녀가 범인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 분실된 오천만 원은 윤미에게는 자신이 이혼 이후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필요로 했던 모성의 결여로 읽히고, 현진에게는 이미 지나가버린 유학의 기회와 산재를 겪었던 사회적 약자로서 자기 위치를 상기시킨다. 이들이 실질적 관계를 통해 경험할 수 있었던 영실이라는 사람의 실제적 모성은, 오천만 원 앞에서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한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그 오천만 원은 영실의 남편 사망 보험금이었고, 자식들을 원조하는 의미에서 자신이 스스로 실버타운에 입주하기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한 돈이다. 물론, 실버타운에 가겠다는 오천만 원어치의 의지는 돌봄 노동으로부터 자녀들을 해방시키려는 모종의 ‘모성’에만 있지 않다. 돈이 많고 멋진 노인들이 기거하는 곳에 다다르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 또한 개입되어 있다. 그녀는 실버타운 입주 계획을 수경에게만 알렸다.
소설은 과일값이라도 보태라며 현금을 꺼내는 영실의 손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수경이 보았다고 암시하지만, 영실은 현진에게 사실 오천만 원은 없었다고 읊조린다. 그러나 영실이 고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영실은 수경을 대하며 실재하는 자식 이상의 모성애를 느끼고, ‘모성애’의 범주 이상의 사적 감정을 경험한다. 그런 수경이 자신이 실버타운에 가는 것을 말렸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형태의 사랑을 수경에게 투신한다. 이성애 중심으로 상상된 에로스와, 그것에서 결코 멀지 않은 어머니 됨을 배반하는 형태는 이렇게도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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