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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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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대학원신문 후기

서로 다른 시간의 더께 속에서

알 수 없는 사용자 2025. 12. 9. 13:52

서로 다른 시간의 더께 속에서

 

유승희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20여 년 만에 자전거를 갖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로 1년간 일본에서 지내게 되었고, 생활을 위해 자전거는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자전거에도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마트와 도서관, 공원을 왕복하며 매일같이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면서도 말이다. 페달을 밟는 일이 버거워진 후에야 바퀴에 꾸준히 바람을 넣고 체인을 닦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의 작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이토록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직접 몸을 움직일 때마다, 켜켜이 얽혀있는 타인의 노동에 빚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감각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종종 잊는다. 그런 나에게 이번 대학원 신문 11월호는 세계를 지탱하는 것이 노동임을 상기시키는 한편, 놓치고 있던 한국의 여러 소식을 전해주었다.

  3면의 쟁점 인터뷰 「쌍용자동차 파업을 돌아보며, 노동존중 사회로 나아가기」와 권영국의 기고문 「쌍용차 투쟁과 노란봉투법」, 그리고 7면의 원우칼럼 「16년 만에 종결된 쌍용자동차 파업과 남은 과제」는 16년간 이어진 쌍용자동차 파업이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 철회로 마무리되고, 노란봉투법이 공포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의미를 자세하게 짚는다. 2009년부터 이어진 현장의 시간은 “월급봉투로 사용”되었던 노란 봉투 속 연대의 마음에서 출발하여 노조법 개정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법의 시간은 여러 번의 좌절로 인해 지연되기도 했지만, 9월 1일의 손해배상 청구 철회와 9월 2일의 노란봉투법 공포를 통해 현장의 시간과 다시 겹쳐지게 되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고 해도, 노란봉투법은 다른 현장의 시간을 견인한다. 5면의 저자와의 대화 「건설과 노동, 그리고 삶의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에서 노란봉투법이 시행되어 “원청사와 직접 교섭이 가능”해지는 내년 3월을 앞두고 “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김용기가 그 예다. 이처럼 현장과 법이 다른 속도의 시간을 살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진실의 반대편에는, 그 시간들이 접속되어 있다는 또 하나의 희망적인 필연이 자리한다. 

  그렇다면 이론의 시간은 어떤가? 1면의 기획 인터뷰 「다시, ‘계급’을 사유하기」에서 강성윤은 “이론은 현실을 뒤쫓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계급투쟁과 노동해방을 중시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은 대학의 정규 과목으로 개설되지 못했지만, 노란봉투법은 반복된 거부권을 넘어 마침내 통과되었다. 그러니 이론이 뒤쫓아야 할 것은 “오늘날 우경화된 현실”이 아니라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16년간의 투쟁이 바꾸어낸 현실이어야 한다. 이론은 “기회주의적 습성”을 가진 지식인만의 것이 아니어야 한다. 7면의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의 필자가 지적하듯 “고액 등록금을 내는 상류층 자녀들의 (…) 교양적 지식의 일종”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빨갱이’라는 사회적 낙인은, 이론이 언제나 이미 현실 속에 침투해 있음을 잔혹하게 증명한다. 어떤 현실을 구심력으로 삼아야 할지 명확하지만, 그 실현은 아직 멀고 요원하기만 하다. 

  현장·법·이론을 포함해 세계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시간의 더께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과거와 미래 나아가 현재까지를 잠재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는 일, 그리하여 기억하는 일을 우리는 역사(학)이라고 부른다. 4면의 학위논문 「한국 근대 학제 성립 시기(1895-1910) ‘국사’ 교과서 편찬 연구」와 6면의 학술동향 「제68회 전국역사학대회: 기억과 기념, 디지털 시대 역사학의 길을 묻다」는 역사학도의 고민을 충실하게 담아냈다. 특히 디지털 및 인공지능 시대,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항로를 묻는 이상국과 강선주의 발표는, 글쓰기에 대한 감각이 달라져 가는 시대 속에서 문학도로서 느끼는 고민과도 맞닿아 있어 고심하며 읽었다.

  기억은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무거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끝내 사라져 버리는 기억도 있다. 5면의 고전읽기 「돌봄, 일상의 계엄을 넘을 수 있을까」에서 언급된 ‘노혼(老魂)’, 즉 노인의 치매가 그러하다. 언제나 “아슬아슬”한 일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돌봄노동을, 시간과 장소를 잃은 노인과 직원의 “서로 다른 리듬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공동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노인과 “동기화”가 가능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기억의 부담은 노인에게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그렇듯이. 

막막할 정도의 수많은 시간은 서로 중첩되기도, 멀어지기도 한다. 부딪히거나 평행선을 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희미해지거나 소멸하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역사는 언제나 출현하는 중이다. 우리가 그것을 직시하고 기억하는 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