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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면/강사 칼럼

바이러스와 시민성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5. 12. 22:44

  코로나19 감염증 확산세는 요즘 들어 조금 누그러지고 있는 듯하지만, ‘코로나 사태이전과 이후의 삶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고 또 앞으로 더 달라질 듯하다. 주변에서 녹화 강의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동료 연구자들이 많다. 학교 당국은 강의를 제작하고 편집하고 관리하는 일련의 노동, 그러니까 대면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발생하게 되는 제반 비용을 강사 본인에게 전가하고 있다. 강의 준비에 쏟아야 할 시간이 못해도 두 배는 늘었다고 한다.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채 장시간 떠드는 일이 그 자체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동료 연구자들은 몸으로 느끼고 있다. 강의 도중 호흡곤란이나 그에 준하는 증상을 느꼈다는 경험담을 어렵지 않게 듣는다. 16년 전부터 인문학 강좌 플랫폼에서 판매하던 강의 콘텐츠를 이번 학기 강의로 그대로 올린 어처구니 없는 사례도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하고 성실한 교강사들은 한편으로는 학교 당국의 책임/노동 전가, 다른 한편으로는 적절한 교육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학생들의 불만 사이에서 상당한 곤란을 겪고 있다. 코로나를 계기로 한 대학 교육과정의 온라인화가 불러올 노동조건의 변화가 어디까지 파급될지 걱정이다. 일부 대학은 분명 이를 호재라고 여길 것이다(이번 학기 다수의 강의 부담을 지고 있는 강사에게 다음 강사칼럼을 의뢰해 한 학기 동안의 생생한 경험담을 묻는 것도 대학원신문사로선 괜찮은 기획일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이번 학기에 아무런 강의도 얻지 못했으므로 동료들의 경험담은 접어두고 다른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한국 정부는 매우 체계적이고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국내 확진자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점부터 당국은 감염병 확산방지 조치의 얼개를 짜두었고, 진단키트의 확보도 체계적이었을 뿐 아니라 혁신적인 검진 방식(드라이브 스루)까지 개발했다. 한국의 방역대응이 전 세계 소위 선진국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도 화제가 됐다.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의 인상을 요구하면서도 물밑으로는 진단키트를 놓고 한국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다. 이미 트럼프가 당선된 시점을 전후하여, 미국은 포용성관대함을 내세워 자기 패권을 유지해 온 예전의 미국과 현저히 다른 성격의 국가가 되었음을 나타내 왔다. 오래도록 문명선진의 상징이었던 프랑스와 그 외 유럽 각국이 집단면역운운하다 결국 한국을 이상적 모델로 참조한다는 소식도 빠지지 않는다. 이번 경험은 기껏해야 월드컵 축구 4, 손흥민, 김치의 효능따위를 자부심으로 삼던 한국의 국민적 자기정위의 방식 자체가 변화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요즘은 산업화/자본주의화 과정을 먼저 겪은 국가와 같은 중립적 표현으로 순화된 선진(advanced)/후진(backward)’이라는 근대화론의 용어법을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선진국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라잡아야 할 모범이라 간주해온 한국의 저간의 사정을 생각하면, 이번 일이 인식적 전환의 계기가 되기는 할 것 같다. 시민들은 현 여당을 지지하든 안 하든 이번 코로나19 대처가 오랫동안 행정부의 부조리와 무능을 엄하게 질타해온 시민들 자신의 성취라고 느낀다. 감염병이 반가운 일도 아니고 과도한 국뽕도 자제해야겠지만, 이런 자부심이 건강한 시민성의 바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코로나 사태가 신자유주의에 제동을 걸 계기가 되리라는 장하준의 지적도 흥미롭다(한겨례2020.04.24.). ‘내셔널리즘이 아닌 스테이티즘(statism)’으로서의 국가주의는 좌파의 언어다. 코로나19 감염증의 대처를 위한 확진자의 동선 파악, 보건인력과 자원의 확충은 신자유주의화에 행정권력이 조금만 제동을 건다면 원활히 취할 수 있는 조치다. 일부 프랑스 언론이 한국의 효과적 통제를 후진국형 권위주의의 유산으로 폄하하고, 네덜란드 언론이 독재의 유산이라고 깎아내린다 한들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들은 아마 자기 문화 안에서 체화한 낡은 자유주의 감각 속에서 말했을 것이다. 물론 시민성이 일사불란하게 통제에 따르는 것과 동일시되고, 공공성을 둘러싼 모든 상상을 국가가 독점하는 일은 현 사태 이후에 더 고민해보아야 할 과제다. 어쨌거나, 한국 근현대사에서 옳고 그름의 척도는 늘 자기 바깥에 있다고 상상되어 왔다. 그런 이상적인 모범 같은 것은 이제 없고, 이제는 나의 길을 간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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