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518광주민주화운동 #임을위한행진곡
- 선우은실
-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염동규 #자본주의
- 김민조 #기록의 기술 #세월호 #0set Project
- 권여선 #선우은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김승옥문학상수상작품집
- 코로나19 #
- 고려대학교언론학과 #언론학박사논문 #언론인의정체성변화
- n번방
- 시대의어둠을넘어
- 한상원
-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로나 콜른타이 #위대한 사랑 #콜른타이의 위대한 사랑
- 쿰벵
- 죽음을넘어
- 5.18 #광주항쟁 #기억 #역사연구
-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 쿰벵 #총선
- 애도의애도를위하여 #진태원
- 공공보건의료 #코로나19
- 임계장 #노동법 #갑질
- 심아진 #도깨비 #미니픽션 #유지안
- 산업재해 #코로나시국
- 국가란 무엇인가 #광주518 #세월호 #코로나19
- 항구의사랑
- BK21 #4차BK21
- 고려대학교대학원신문사
- 보건의료
- 미니픽션 #한 사람 #심아진 #유지안
- 수료연구생제도 #고려대학교대학원신문사 #n번방 #코로나19
- Today
- Total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첫사랑 본문
첫사랑
글 : 심아진 (소설가, 동화작가)
그림 : 유지안
부패 정권에 반대하고 소위 사회과학을 공부한다는 대학의 동아리 방. 비상하고 추락하며 미친 듯 춤을 추던 역사, 자본, 민족, 시대, 투쟁, 혁명, 정의, 평화, 해방 등이 일시에 동작을 멈춘다. 의도하지 않고도 주변을 위축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즈음에는 어디서나 흔하던 평범한 동아리 방이, 한 여자의 등장으로 전혀 평범하지 않은 공간으로 바뀌고 만다. 개성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제각각의 개념들과 심하게 풋내가 나는 그 개념의 종들이 모두 여자 하나만을 바라본다.
역사라는 놈이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내게 귓속말을 중얼거린다.
- 인류에 속한 종족이 아니야. 저 여자는 말을 타고 달리는 와중에, 먹고 자고 섹스도 하는 외계 종족이야.
역사는 언제나처럼 익숙하지 않은 대상에 심한 적대감을 보인다. 나는 손바닥으로 역사의 이마를 가볍게 치며 말을 막는다.
- 인류에 속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게 어디 있어? 생긴 걸 봐. 저 여자는 인간이야.
당연히 인간이다. 하지만 역사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를 깔보는 게 분명한 녀석이, 불리할 때면 언제나 사용하는 부러진 자를 꺼낸다. 그 허접한 자로 불의나 반란의 단초 같은 거라도 찾아 가늠해 보려는 거겠지. 나는 그를 제지한다.
-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아름다움이라기보다 아름다운 ‘느낌’에 이른 저 얼굴 말이다.
역사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나는 숨이 막힌다. 여자가 거의 완벽하게 자신으로 충만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필시 목 졸린 듯한 얼굴이었을 내게 자본이 다가와서 친근하게 팔짱을 끼며 말한다.
- 저 여자를 죽여 버리고 가진 것을 빼앗자. 저 여자는 고대 트라키아에서 제작된 황금보검을 가지고 있어. 저절로 굴러 들어온 기회를 가치 있게 운용하지 않는 것은 낭비요 죄악이야.
나는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은 자본에게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 낭비나 죄악을 운운할 입장은 아닐 텐데.
역사가 내게 착 붙은 자본을 억지로 떼어내며 비집고 들어선다.
- 역사의 쓰레기요 부유물인 자본 따위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분수를 모르는군!
이제껏 받아온 모욕에 지금의 모욕까지를 더해 모욕의 산술 평균을 내는 중인 자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 자그마치 1조 달러짜리 보검이라고!
자본이, 그 1조 달러짜리 보검을 조금 전까지도 제가 지니고 있었던 듯 비통해한다. 무지막지한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매우 예민한 척을 하는 그답게 비장한 말투다. 하지만 역사도 나도, 그의 가면에는 익숙해서 동요하지 않는다. 역사가 깐죽거린다.
- 억울하면 분식회계, 아니 분신자살이라도 해버리렴.
태극 문양이 있는 부채를 연신 부쳐대던 민족이 으스대며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 저 여자는 우리의 적이야. 하늘과 땅이 열렸을 때부터 여자는 말안장 밑에 깔아 놓은 고기를 씹어 먹으며 달렸고, 별빛 같은 눈을 감지도 않은 채 잠을 잤어. 우리와 같지 않다는 데 내 목을 걸지. 내 피를 죄다 뽑아가도 좋아.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민족답게 거창한 것을 건다. 민족의 얼굴은 이미 피가 죄다 뽑힌 양 창백해져 있다. 어디선가 진동하는 피 냄새에 혼미해진 내가 약간 주눅 든 채 말한다.
-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시원 아닐까? 저 여자는 잃어버릴 것을 애초에 갖지 않은 고대 영웅을 닮았어.
민족이 재빨리 빨간 띠를 이마에 두르며 게거품을 문다.
- 시원이라니, 절대 아니야! 저 여자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일을 본 후 자신의 똥 무더기들을 사방으로 뿜어 우리의 경계를 죄다 흩어 버렸어. 저 여자는 우리와 달라, 다르다고.
그때 민족의 천적이 바로 옆에 선다. 쉽게 격렬해지는 민족을 놀려먹고 싶은 유혹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시대다.
- 저 여자의 어디가 우리와 다르지? 또 다르다고 한들 어때? 이것도 내 거, 저것도 내 거, 그러고는 몸을 꽁꽁 싸고 있으니 발전이 없는 거야.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그러나 시대의 잘난 체는 여자의 작은 동작 하나로 중단되고 만다. 여자가 동아리방의 테이블 위에 놓인 누군가의 담배 하나를 집어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마치 이곳에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기 위해 왔을 뿐이라는 듯 집중해서 연기를 만들어낸다. 그 연기가 바람에 마음을 맡긴 새처럼, 물결에 영혼을 내어준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피어오른다. 느슨한 듯 보이지만 제 갈 길을 잊지 않은 연기가 역사, 자본, 민족, 시대를 장악하는 동안 나를 포함한 그 방의 모든 것들이 숨을 죽인다.
푸른 연기가 치밀하게 움직여 한 남자에게 가닿는다. 남자는 느닷없이 등장한 여자 때문에 가련해져 있다.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으므로 비참해져 있다. 남자는 스스로를 저주하며, 저만치 나가떨어진 역사와 자본, 민족, 시대를 애처롭게 바라본다. 여자가 입을 열지 않은 채 말한다.
- 모두 우스워. 추잡한 가면 밑으로 실은 제 욕망을 해소하고 있으면서, 짐짓 그렇지 않은 척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여자는 너무나 압도적인 기운을 내뿜어서 그 방의 어떤 것도 여자에게 반박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젊은 남자는 몸속 수분이 죄다 끓어올라 증발해 버린 듯 푸슬푸슬하다. 헙! 흡! 간절하지만 적절하지는 않은 듯한 감탄사가 방 여기저기서 울린다.
별안간 여자가 칼날 같은 손을 휘두른다. 거침없이, 예의 없이, 한계도 없이. 여자의 등장에 관심 없는 척했지만 이미 싸울 준비를 마쳤던 투쟁의 팔이 느닷없이 잘려나간다. 이어 판을 뒤집을 생각에 묘하게 웃고 있던 혁명의 다리가 깔끔하게 떨어져 나간다. 여자는 바닥에 떨어진 팔과 다리를 발로 차서 치워버린다. 그저 관망이나 하려던 내 입술이 뜻밖에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 대상 자체에 대한 사랑과 그걸 하는 자신에 대한 사랑은 별개이지 않나? 왜 솔직하게 그냥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고 얘기하지 않지?
여자가 이어 말한다.
- 시시하다, 정말.
나는 이전에 한 번도 뜻을 모아 본 일 없는 그 방의 모든 것들이 일제히 하나로 뭉치는 소리를 듣는다. 그들 모두 기갈 난 걸인처럼 여자와 내게 손을 뻗는다. 팔을 감싼 투쟁과 다리를 저는 혁명을 비롯해 날고뛰는 일련의 개념들이 핏대를 올리며 떠들기 시작한다.
표정 없는 얼굴로 한껏 속 생각을 숨겼던 정의가 제일 앞에 선다.
- 사명감을 갖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진리를 추구하는 도리를 시시하다고 할 수는 없지.
여자가 피식 웃더니 갑자기 정의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싼다.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달아오른 정의가 버둥거려 보지만, 여자의 손에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언제나 도망갈 구멍을 마련해 두지 않고서는 나서지 않던 정의가 처음으로 도망갈 곳을 찾지 못한 채 당황한다. 나는 여자를 말리고 싶다. 하지만 오히려 여자를 응원하듯 여자의 뒤에 바투 붙어 서 있다.
생색내는 일에 빠지지 않는 평화가 정의를 나무라며 중후한 목소리를 낸다.
- 무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건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내가 소소昭昭한 평화가 어쩐지 위태롭다고 느끼는 사이 여자가 재빨리 손을 그에게로 옮긴다. 순식간에 평화의 빳빳한 흰옷이 여자의 작은 두 손안에서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만다. 복구할 수 없는 주름에 갇힌 평화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다. 여자가 종이를 휙 던지더니 말한다.
- 정의와 평화도 한갓 키치일 뿐이야.
자신감을 잃어버린 일이 이전에는 없던 해방이 폭삭 늙어버린 얼굴로 말한다.
- 해방될 것이 없는 인간을 만난 건 정말 오래간만이야.
해방마저 주저앉자 남은 모두가 덩달아 전의를 상실한다. 여자가 다시 의자에 앉더니 씨익 웃는다. 소리 나지 않는 웃음이 날개도 없이 온 방을 날아다닌다.
여자의 웃음을 본 순간,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선명히 깨닫는다. 또한 모두가 왜 여자를 그토록 경계했는지도 알아차린다. 비단 냉소적인 말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자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자가 실은 아무 목적 없이, 그 방에 그저 놀러 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 어떤 것도 바꾸거나 고치려고 오지 않았다. 요구하는 것도 없고 기대하는 것도 없다. 여자는 그저 무한한 에너지로 산을 이루고 계곡을 만들며 즐겁게 달리던 중에 잠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목적이 없어 본 일 없는 무수한 개념들은 그저 ‘놀러’ 왔을 뿐인 여자에게 쉽게 제압당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동아리 방의 모두는, 그러니까 젊은 남자는 그리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를 만져보며 실재實在에 경악한다.
잠시 후, 여자가 방에 있는 모두에게 자신을 반추하며 괴롭힐 시간을 주려는 듯 천천히 방을 나간다. 젊은 남자는 놓쳐서는 안 될 것을 놓치고 만 사람처럼 불안해한다. 말라리아로 고열이 난 사람처럼 떨고 있다. 하지만 그는 조금은 영리해서 여자가 서 있는 땅이 결코 자신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슬퍼한다. 그가 내게 묻는다.
- 잡을 수 없을 텐데 왜 내게 나타난 거지? 필시 잃고 말 사람인데 도대체 왜?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머릿속으로 가만히 그려볼 뿐이다. 여자는 곧 제 발로 다시 남자를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아니라 그림의 모델이 필요해서일 뿐이다. 여자의 관심사는 남자가 아니라 ‘사로잡힌 자의 얼굴’이므로. 여자를 사랑하는 젊은 남자는 순순히 여자의 모델이 되겠지만 상처 입을 것이다. 그는 여자가 다녀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앓아누울 것이며, 마침내 그녀와 함께가 아니라면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될 것이다. 여자는 여자에게 연루된 내게 무심할 테지만 남자는 나로 인해 끝없이 고통받을 것이다. 지겹게 반복되는 악몽에, 죽음만이 답일 듯한 시간이 시작될 것이다. 자신만을 온전히 사랑하는 여자, 그 여자는 마녀가 틀림없지만, 젊은 남자는 자청하여 마녀의 제물이 될 것이다.
나는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침묵한다. 젊은이의 첫사랑인 나는, 그가 영원히 고통받을 첫 순간에 이른 걸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