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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면/미니픽션

문제는 생존이야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3. 24. 13:49

문제는 생존이야

 

심아진(소설가, 동화작가)

 

 

그림 유지안

 

순수한 쥐며느리 청년 철이에게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여느 날처럼 숲을 헤집고 다니다가 쥐며느리 아가씨 순이와 더듬이가 얽히고 말았던 겁니다.

털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철이는 더듬이를 떼어내는 순이의 신중한 태도와 네모동글 오동통한 모습에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지요. 이전에 철이는 위대한 쥐며느리 고고학자가 되는 것 외에 다른 꿈을 꾼 적이 없습니다. 고대 생물의 뼈나 이, 화석 등을 연구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니는 게 일상이었지요. 철이는 쥐며느리의 발생이 중생대가 아니라 선캄브리아대에 이루어졌다는 몇 가지 증거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쥐며느리가 삼엽충보다 앞선 갑각류의 조상이라는 사실도 증명해 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철이는 연구를 통한 기쁨과 학문이 가져다주는 진리만이 가치 있다고 여겼고 그것 외에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순이를 본 순간, 모든 게 변했습니다. 브라키오 사우르스의 발자국이든 암모나이트의 화석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연구에 집중하려 해도 순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순이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새끼를 낳아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바람만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순이는 철이를 쌀쌀맞게 대했습니다. 철이가 종일 자연사박물관에서 사슴 뼈를 갉아 마련한 찌꺼기를 주어도 제1 더듬이 한 번 까딱거리지 않았습니다. 죽은 동물의 털을 꼬아 만든 목걸이도 꽃잎으로 엮은 모자도 모두 거절했습니다. 쥐며느리 사이에 보약으로 알려진, 물에 빠져 죽은 꿀벌을 주려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순이는 촉촉하고 보드라운 그 벌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말했습니다.

난 내가 싼 똥만 먹어도 배가 불러.”

사실 많은 쥐며느리가 자기가 싼 똥을 먹기도 합니다. 썩은 나뭇잎이든 죽은 곤충이든 먹을 게 널려 있어서 그럴 일이 거의 없기는 해도요. 순이가 제 똥을 언급한 건, 똥을 먹으면 먹었지 철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철이는 혹시 순이가 다른 쥐며느리를 마음에 둔 게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따라 다녀보니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순이는 다른 쥐며느리나 쥐며느리에게 우호적인 벌레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고, 묵묵히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듯했습니다. 철이는 순이의 그런 점까지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철이는 순이의 사랑을 얻는 게 1 6천만 년 전에 출현했다고 알려진 쥐며느리의 흔적을 찾는 일보다 1 6천만 배는 더 가치 있는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연구는 뒷전이 되었습니다. 순이의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지네나 노래기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철이는 사랑 때문에도 괴로웠고 그간의 연구를 도무지 진척시킬 수 없어서도 괴로웠습니다. 세상이 온통 쥐며느리 색이었습니다.

 

철이는 괴로움을 참다못해 가장 친한 친구인 돌이에게 갔습니다. 푹 익은 포도알 몇 개가 들어있는 작은 웅덩이에 꽁무니를 들이밀고 있던 돌이가 철이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돌이는 꽁무니로 물을 마실 때마다 자기가 공벌레로 태어났으면 결코 누리지 못했을 호사를 누린다며 즐거워하곤 했습니다.

예쁜 순이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서 연구에 매진할 수가 없어. 사실 숨쉬기도 어려워.”

쥐며느리의 생물학적 발생과 생태를 연구하는 돌이가 머리를 숙여 제 몸을 살피더니 가슴을 쭉 펴며 말했습니다. 

예쁜 게 도대체 뭐야? 다른 암컷들도, 심지어 너나 나도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잖아.”

철이가 제2 더듬이를 한 번, 두 번, 세 번, 차례로 꺾었습니다. 세 번이나 꺾었다는 건 더듬이를 빠짝 세울 때보다 더 화가 났다는 걸 뜻했습니다.

감히 어디 비교를! 네가 여섯 등분이 되어 있는 그 귀엽고 앙증맞은 배를 못 봐서 그래.”

돌이가 여섯 등분이 되어 있고 귀엽고 앙증맞기로 따지자면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의 배를 철이에게 들이밀었습니다.

이런 배 말이야?”

화가 난 철이가 펄쩍 뛰어올랐습니다. 더 화를 냈다가는 온몸의 파란 피가 모두 빨갛게 변할 것만 같았습니다. 돌이가 철이를 진정시켰습니다.

알았어, 알았어. 순이가 특별하다는 걸 인정할게.”

철이가 억울하다는 듯 덧붙였습니다.

게다가 그 배에는 꽃무늬가 있어. 우아한 백합꽃 말이야. 백합 알아?”

쥐며느리의 생태를 연구하는 돌이가 치명적인 향을 내는 백합을 모를 리 없습니다. 쥐며느리의 조상 중에는 백합 향을 너무 맡다가 죽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돌이는 배에 백합 무늬가 있다는 쥐며느리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배에 어떻게 꽃무늬가 있겠어. 헛걸 본 거지.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분명히 있어. 순이 배에 아름다운 백합 무늬가 있다고.”

돌이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말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구나. 알 깨던 힘까지 다 짜내서 최선을 다해 봐.”

 

철이는 순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시 한번 힘을 냈습니다. 축축한 오동나뭇잎 사이를 한참이나 뒹굴어 향이 몸에 배게 한 후 유혹하는 춤을 추기도 했고, 잠수 대회에 나가 물 아래에서 한 시간이나 버티며 바닷가재에 맞먹는 갑각류임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공벌레처럼 보이도록 있는 힘껏 배에 힘을 주어보기도 했습니다. 돌이가 들었다면 혀를 끌끌 찼겠지만, 공처럼 몸을 마는 공벌레를 동경하는 쥐며느리들이 꽤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철이는 공처럼 몸을 말 수 없었고 배만 아팠지요. 순이는 철이의 어떤 정성에도 감동하지 않은 채 두 가닥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유유히 철이 곁을 지나가곤 했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가 순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철이는 슬퍼하며 끝없이 순이 주변을 배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뭇잎을 물고 가던 순이의 오른쪽 둘째 다리가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나뭇잎이 크고 무거워 미처 주위를 살피지 못한 탓이었지요. 순이가 더듬이를 비비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철이가 재빨리 다가가 소리쳤습니다.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

철이는, 벗어나겠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거미줄에 더 많이 엮이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쥐며느리의 등껍질도 순식간에 뚫어버린다는 쥐며느리거미의 거미줄에 걸린 순이의 다리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철이야, 도와줘!” 

순이가 철이에게 도움을 청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철이는 용기가 샘솟는 걸 느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순이를 구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악스러운 거미줄을 끊기란 만만치 않았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거미가 날카로운 이를 번득이자, 순이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갑자기 철이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순이에게 주려고 유리를 갈아 만든 반지가 있었거든요. 철이가 제 왼쪽 일곱 번째 다리에 걸어두었던 반지를 빼 얼른 거미줄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거미가 불쾌한 듯 눈을 부라리며 빠른 속도로 다가왔습니다. 철이는 알을 깨던 때의 힘은 물론 허물 벗던 때의 힘까지 동원해 열심히 줄을 갉았습니다. 하지만 끈적끈적한 거미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거미의 무서운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순이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대로 죽나 봐.”

철이가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오줌을 싸, 어서!”

두 쥐며느리의 등 껍데기 미세한 구멍에서 암모니아 증기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다가오던 거미가 지독한 냄새에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거미줄이 툭 끊겼습니다. 

 

철이와 순이는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철이와 순이의 다리에서 털 몇 가닥이 떨어져 나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순이가 철이에게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 정말 고마워.”

철이는 비로소 순이의 사랑을 얻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운명의 현장에서 큰 역할을 한 유리 반지를 내밀었습니다.

나의 새끼를 낳아줄래?”

하지만 순이는 몹시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나는 이미 새끼를 가졌어.”

순이가 볼록한 배를 내밀더니 배 주머니에 가득한 작고 하얀 새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직 미처 부화하지 못한 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철이가 백합 무늬라고 생각했던 것은 배 주머니 밖으로 비친 새끼들과 알들의 실루엣이었던 모양입니다. 순이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아버지 없이 내가 낳은 애들이야. 나는 수컷 쥐며느리가 필요 없어.” 

 

비참한 기분에 잠긴 철이가 다시 친구를 찾았습니다. 두 친구는 이번에는 사과가 담긴 웅덩이에 나란히 꽁무니를 담갔습니다.

난 정말 바보였어. 고고학에만 빠져 있느라 순이가 혼자서 새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

돌이가 달콤하고 알싸한 물을 꽁지로 쭉쭉 들이키더니 말했습니다.

나도 조금 전에 알았는데, 수컷 쥐며느리가 모두 사라지는 시대가 올지 몰라.”

철이가 멍하니 돌이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그렇게까지야 되겠어. 순이 배 주머니에는 수컷 새끼들도 있었어.” 

돌이가 한심하다는 듯 더듬이를 흔들더니 철이에게 최신 의학 잡지를 내밀었습니다.

너나 나나, 화석이나 계통을 연구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

철이가 잡지를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시큰둥하게 말했습니다. 

그럼 뭐 사랑이라도 연구해야 하는 거야? 문제는 사랑이었던 거야?”

돌이가 답답하다는 듯 의학 잡지를 쫙 펼친 후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볼바키아라는 박테리아에 감염되면 수컷 새끼들이 모두 암컷이 되기도 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대.”

깜짝 놀란 철이가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꽁지를 부르르 떨며 물었습니다.

그럼 수컷이 모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야?”

돌이가 더듬이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네. 사랑도 살아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거지.”

두 쥐며느리는 일곱 마디 가슴과 여섯 마디 배를 잔뜩 구부린 채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랬습니다. 문제는 생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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