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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면/미니픽션

일그러진 진주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5. 7. 21:14

일그러진 진주

 

심아진 (소설가, 동화작가)

 

그림_유지안

바로크에 관한 박사 논문이 창 없는 집에 나를 가둬둔 지 두 해째였다. 라이프니츠의 작고 완벽한 세계에 하릴없이 웅크리고 있던 나를 끌어낸 것은 참석이 불가피한 장례식이었다. 나는 커다란 이민 가방에서 심하게 구겨진 검은 양복 한 벌을 찾아냈다. 이사 온 후 짐을 정리하지 않은 건 짐을 부릴 만한 가구도 공간도 없어서였다. 장난감처럼 가벼운 다리미는 작동을 멈춘 지 오래였다.

재개발 밀집 지구인 동네에 그렇게나 많은 세탁소가 있다니 놀라웠다. 기다렸다는 듯 뺨을 때리는 햇빛을 피하며 걸어가는 동안 발견한 세탁소만 십여 군데가 넘었다. 명품, 백광 등의 이름이 붙은 세탁소와 코인세탁소, 크린이나 클린이라는 단어가 붙은 무수한 세탁소를 거쳐 발을 멈춘 곳은 이름도 없이 세탁소라고만 표기되어 있는 곳이었다.

통닭집과 국밥집 사이에 생뚱맞게 자리한 세탁소는 출입문에까지 옷이 걸려 있었다. 옷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자 뜻밖에 익숙한 음악이 들렸다. 논문을 쓰는 동안 몇 번인가 내 오감을 비틀고 짜부라트린 일이 있는 그 바이올린 선율이 분명했다. 주인은 계절과 무관한 다채로운 옷들 사이에서 주름이 풍성한 드레스를 다리는 중이었다. 주인의 얼굴 또한 드레스 자락처럼 풍성한 주름으로 덮여 있었는데 그게 묘하게도 안도감을 주었다.

급히 장례식에 가야 합니다.”

내가 말하자 세탁소 주인이 무어라 응대했으나 음악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비탈리의 샤콘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무시무시하리만치 슬프다고 알려진 바로크 곡이 다시금 나를 좁은 방에 가두는 듯했다. 나는 간곡히 사정했다.

다림질만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무뚝뚝해 보이는 주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다행히 그건 단호한 거절이라기보다 내키지 않지만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나는 둘둘 만 양복을 싸 안은 채 가게를 두리번거렸다.

세탁소는 이중, 삼중으로 걸린 옷들 때문에 비좁고 어두웠지만 있을 게 다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입구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드라이클리닝 기계와 재봉틀이, 맞은편의 다림질 테이블 너머로 간이침대가 있었다. 침대 뒤편 통로에는 개수대인지 세면대인지 알 수 없는 시설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방과 크기와 구조가 흡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세탁소에 걸어둔 옷들은 안정감을 주는 반면, 내 방에 쌓아놓은 책들은 몹시 위태롭게 느껴진다는 점 정도였다.

앉아서 기다려도 될까요?”

나는 그렇게 물었지만 이미 비닐을 씌운 옷들 아래에서 작은 플라스틱 의자를 발견하고 앉은 터였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 같은 게 온몸을 파고든 듯 찌뿌드드했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서였다.

주인이 나를 힐끗 보더니 다림판에 끼운 드레스를 휙 돌려 다시 끼웠다. 드레스 윗부분에 장식으로 달린 하얀 진주들이 다그락다그락 소리를 냈다. 곧 묵직해 보이는 다리미에서 뿌옇고 따뜻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결혼식이나 다른 축하 자리였다면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장례식입니다. 꼭 가야만…….”

나는 주인이 내 사정을 외면하지 않도록, 피치 못 할 사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드라이클리닝 기계에서 나는 소음과 치이익, 수증기 뿜는 소리, 그리고 비탈리의 비장한 음색에 묻혀 나조차도 잘 들리지 않았다. 주인은 폭이 도대체 얼마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드레스를 끝없이 돌려가며 다리는 데 열중해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보라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인이 들어섰다.

여기 단 뜯어진 거 좀 봐요. 집에 가서 보니 이 모양이잖아.”

주인이 다리미를 세워둔 채 앞으로 성큼 나섰다. 여인이 내민 재킷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얘기하는 와중에 내가 신경 쓰인다는 듯 흘끔흘끔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급하단 말이에요. 조금 있다가 다시 올 테니 얼른 해주세요.”

큰 목소리를 내던 여인이 재킷을 옷더미 속에 던져두고는 떠났다. 나는 곧 나를 스치듯 지나간 여인이 내 무릎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했다. 보라색 머리카락은 오목한 곳이 볼록한 곳이고 볼록한 곳이 결국 오목한 곳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구불거렸다. 치익, 물 뿜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주름 하나하나가 온전히 독립되어 있는 동시에 이어져 있지.”

바로크의 구름처럼 몽환적인 수증기 사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인이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말했는지 파악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초조해져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피부가 재생될 틈이 없었던 손가락들 끝은 빨개진 채 뚱뚱 불어 있거나 딱지가 앉아 있었다. 손가락들은 지성과 명성을 갖추고도, 아니 갖추어서 오히려 둔감하고 나태해진 독일 비애극의 군주들처럼 처참했다. 흉물로 전락한, 모욕당하고 고초를 겪은 손가락들을 보는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장례식 때문에 마음이 들끓어서일지 몰랐다.

눈물을 그치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재봉틀 뒤편의 타원형 거울을 발견했다. 나는 그 빽빽한 가게를 어김없이 재현하고 있는 거울을 응시했다. 내가 지난 2년간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매달렸는지조차 잊고 매달렸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가상의 세계가 보였다. 그 가상의 세계에서 나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를 긍정적 차이, 또한 잠재태로서의 주름으로 해석한 들뢰즈를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러나 무한히 펼쳐질 수도 있을 주름은 입을 꽉 다문 조개처럼 내게만 유독 완고하게 굴었다. 나는 내면의 완벽한 신을 신봉하는 데까지는 나아갔으나 변곡점을 통해 주름을 펼치는 데에는 거듭 실패했다. 결국 알게 된 거라곤, 내가 학위를 따는 세상과 내가 굶주리지 않는 세상은 양립 불가능하며, 민지를 만나는 세상과 민지와 헤어지지 않는 세상 또한 공존 불가능하다는 것뿐이었다.

어느새 비탈리의 음악이 끝나 있었다. 주인이 다리미판 아래로 허리를 굽히더니 새로운 곡을 틀었다. 이번에는 장 밥티스트 륄리였다. 루이 14세의 발레 공연을 위해 작곡했다는 E단조 쿠랑트가 작은 세탁소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륄리는 가난한 방앗간 집 아들의 영혼과 야심찬 프랑스 궁정음악원 감독의 영혼을 애초부터 모두 가졌던 자가 틀림없었다. 그의 지각은 주름 잡힌 영혼을 펼치는 데까지 거침없이, 때로 비열하거나 뻔뻔한 짓도 서슴지 않으며, 나아갔을 터였다.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적대적인 오후와 낯선 밤이 서로를 침범하며 뒤섞이고 있었다. 어둠에 싸인 깊이감이나 명암의 극명한 대비를 감당하기에는 내가 가진 빛이 너무도 옅었다. 나는 세탁소 주인에게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전깃불 좀 켜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나 어둠에 눈이 익은 듯 혹은 그 어둠을 심지어 즐기는 듯 보이는 주인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분주하게 손을 놀릴 따름이었다. 웅장하게 펼쳐질 주름을 하나하나 잡아나가는 그의 손은 지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어 보였다. 등이 구부정한 노파가 가게로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미역 좀 사.”

노파의 손에 들린 건 뻣뻣한 마른미역이 아니었다. S자형으로 뒤틀린, 뱀처럼 구불구불한 미역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다림판 뒤에 서 있던 주인의 팔이 별안간 길게 늘어나더니 미역을 받아들었다. 그 팔이 다시 뒤로 가더니 미역을 떨어뜨리고는 곧 천 원짜리 몇 장을 노파의 손에 들려주었다. 노파가 수염 난 인중 주변에 오글오글 주름을 모은 채 웃으며 가게를 나갔다.

문득 나는 주인의 뒤통수 너머에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보았다. 개수대인지 세면대인지가 있는, 그러니까 미역을 던져버린 통로 끝의 작은 문이 진원지였다. 거기서 나오는 빛은, 완벽한 세계라고 믿은 내 방에서 내가 스스로를 감금하고서 찾아 헤맸으나 끝내 찾지 못한 그 한 줄기 빛임이 분명했다. 나는 손톱을 더 세게 물어뜯었다. 찝찌름한 피 맛이 느껴졌는데 어쩐 일인지 전신으로 황홀한 기운이 번져갔다.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헐렁한 체육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가 양복바지를 내밀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 딱 여기에 자국이 있다니까? 이건 너무하잖아, 안 그래?”

남자가 가리킨 곳은 바지 지퍼가 있는 부위였다. 누가 봐도 민망한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허연 자국이 아메바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세탁소 주인과 남자가 동시에 킬킬대며 웃었다. 뜻밖에 남자의 흥겨운 기분이 파도처럼 꿀렁꿀렁 번져와 내게도 닿았다. 나는 살짝 몸을 떨었는데 남자가 나간 후로도 전율은 끊기지 않았다.

이후로도 계속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누군가는 한복의 동정 다는 일을 부탁했고 누군가는 인조가죽의 목덜미 부분에 때가 덜 빠졌다며 투덜거렸다. 얌전히 돈을 낸 후 비닐에 싸인 코트를 들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가끔,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내게도 인사했다. 들어오면서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고 나가면서 어깨를 툭툭 치는 사람도 있었다. 내 코가 그들에게서 풍기는 냄새를 따라 절로 씰룩였다. 나는 장례식에 가기로 한 내 결정이, 그리고 세탁소 방문이 썩 마음에 들었다. 말아 들고 있던 양복은 어느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모았던 다리는 자연스레 벌어졌다.

마침내 다림질이 끝난 모양이었다. 세탁소 주인이 드레스를 옷걸이에 걸고 빙그르르 한 번 돌리자 무수한 주름이 펼쳐졌다 오므라들며 출렁였다. 주인이 돌연 백열등을 켜더니 내게 말했다.

, 이제 당신 차례야.”

나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고 바지를 벗고 속옷까지 홀랑 벗은 내가 다림판 위에 반듯하게 누웠다. 주인이 다림판 아래에 있는 오디오를 만지작거리더니 다짐하듯 내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곧 코렐리의 우아한 바로크 합주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두 대의 바이올린과 첼로가 주선율을 끌어가고 비올라를 비롯한 나머지 현악기들이 조화를 이루며 전개되는 가운데 통주저음을 담당한 챔발로 등이 화음을 넣었다. 얼핏 생각이 났다. 나를 사로잡은 바로크의 매력은, 비단 음악만이 아니라 건축, 미술, 문학 등 모든 영역에서, 끝없이 확장하고 변화하나 본질적인 주제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데에 있었다. 닫혀 있는 동시에 열려 있고 벗어나는 동시에 뛰어드는, 삶의 그 본질 말이다.

나체로 누운 나를 향해 세탁소 주인이 뜨거운 다리미를 들었다. 순간 등 아래에 배기는 게 있었는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인이 다린 드레스에서 떨어진 진주가 틀림없었다. 완벽하게 동그랗지는 않은 진주, 실은 그래서 더 본연의 모습일 진주였다. 나는 일그러진 진주, 바로크를 품은 채 조용히 나의 장례식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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