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그깟 5만 원 본문

8면/미니픽션

그깟 5만 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6. 4. 11:01

-심아진(소설가·동화작가)

 

ⓒ그림_유지안

 

오늘은 내 기필코…….

혜나가 얼굴에 덮었던 마사지 시트를 휙 벗기더니 분연히 일어선다. 옆집에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기 때문이다.

내 돈 갚기는 어렵고 생일잔치는 한다 이거지?

5만 원을 받으러 나가는 혜나의 얼굴은, 언젠가 양다리 걸친 전 남친을 후려치러 갔을 때처럼 결연하다.

 

옆집 사는 여자가 몹시 곤란한 얼굴로 우리 집 문을 두드린 건 한 계절 전이었다. 그날 저녁 혜나는 방충망을 툭툭 쳐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매미 때문에 예민해져 있었다. 여섯 개의 다리를 쩍 벌린 채 꼬리를 떨며 울어대는 매미가 뻔뻔한 추행범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혜나는 이 나쁜 놈아! 에잇, 이놈!” 해대며 매미를 쫓다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옆집 여자는 뜻밖에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내일 우리 건이 아침 일찍 준비물 사야 하는데, 지금 밖에 나가기는 좀 무섭고 해서 말이죠.

혜나는 여자의 남편이 출장 중이고 ATM기가 있는 편의점 가는 골목길에 가로등이 깨졌으며 콧구멍만 한 문방구에선 카드를 쓸 수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그 남편이 오래전에 집을 나갔고 가로등은 멀쩡하며 문방구에서 카드를 얼마든지 환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이후로 여자는 갖은 말로 둘러대며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혜나가 슬리퍼를 끌며 걸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여차하면 뛰어나갈 태세로 귀를 벽에 댄다. 사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소리는 잘 들린다. 위층 할머니가 화투짝을 딱딱 맞추는 소리는 물론 아래층 독신남이 끙끙거리며 내는 은밀한 신음까지 들릴 정도다. 빌라가 건설업자들이 앞다투어 자재를 빼돌리던 1990년대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옆집에는 목쉰 꾀꼬리가 울다 말다 하긴 해도 엄연히 초인종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혜나는 손가락 하나로는 감당하기 힘든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주먹으로 꽝꽝 문을 두드린다.

문 열어요.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아줌마! 아줌마!

 

혜나는 적대감을 담아 여자를 아줌마라 불렀다. 옆집 여자는 사실 혜나보다 한 살이 더 어렸다. 그걸 안 건, 반년 전 우리가 대학 근처의 원룸과 고시원을 벗어나 처음으로 방과 부엌이 제대로 구분된 집으로 이사를 온 날이었다. 옆집 산다는 그녀가 통성명이나 하자며 인사를 건넸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신변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국악과에 진학하려다 포기했다는 여자의 목소리는 아닌 게 아니라 창을 하면 아주 잘 할 듯 걸걸했다. 혜나와 나는 곧, 우리가 비단 생활만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해서도 의혹을 불려가며 미적거리는 동안 여자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초등학생이 되기까지 길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틈틈이 일해서 악착같이 돈을 번다는 사실도 알았다.

내가 깡다구가 좀 있어요. 별명이 악바리였다니까요, 악바리.

여자는 현재의 자신을 몹시 자랑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혜나와 나는 그러셨군요그러시군요로 비위를 맞춘 후 간신히 여자의 수다에서 놓여났다. 그날 저녁 혜나는 옆집 여자가 생활력이 강해 보인다며 칭찬했다. 나도 정말 그렇다며 물색없이 맞장구를 치다가 싸늘해진 혜나의 눈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박사학위를 포기한 후 2년째 공무원 시험에 도전 중이던 내가 새겨야 할 단어는 옆집 여자가 아니라 생활력이었다.

 

혜나의 생활력도 강해진 걸까? 치사하게 애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다며 물러선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던 혜나가 작정한 듯 아이 이름을 부른다.

건아, 건아! 문 열어.

하지만 옆집은 조용하고, 혜나의 외침과 문 두드리는 소리만이 계속 울린다. 쿵쿵, 쾅쾅!

 

혜나가 처음부터 각박하게 군 건 아니었다. 한 주가 지나자 바쁘면 잊을 수도 있죠, 하며 천천히 달라고 했고 두 주가 지나자 자기도 깜빡 잊었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여자가 의도적으로 갚지 않는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여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돈을 갚지 않았다. 어떤 날은 애가 아파 병원을 뛰어다니느라 바빴고, 어떤 날은 현금인출기가 카드를 날름 삼켜버렸다고 했다.

여자의 변명은 갈수록 신파조가 되었다. 5만 원을 찾아서 들고 오는 길이었는데, 하필 애 신발 밑창이 떨어진 걸 그때 알았다고 했다. 타고 흘러내리지는 않으면서 눈에만 맺혀 있는 눈물이 어찌나 그럴듯한지, 혜나는 하마터면 그 돈 안 받겠다고도 할 뻔했단다. 여자가 혜나를 보더니 먼저 다가와 돈을 꼭 돌려주겠다고 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곧, 남편 없이 혼자 애를 키우는 처지가 얼마나 불우한지를 늘어놓아 혜나가 도망치듯 떠나가게 했다. 통장 잔액이 5천 원도 되지 않는 걸 발견했노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동정을 구한 날도 있었다. 혜나는 여자의 정치 탓, 경기 탓에 더해 신세 한탄까지 듣다가 아뿔싸, 싶었단다. 그녀가 말끝에 이번 달 전기세도 내지 못해 그러니 3만 원만 더 빌려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혜나는 거절한 걸 자랑스러워했지만, 곧 또 당했다며 우울해했다.

두 달이 지나자 혜나는 여자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옆집의 살림살이가 그렇게까지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매일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나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 소리로 보아 전기세 3만 원을 내기 힘들다는 말은 가당치 않았다. 게다가 옆집은 음식을 자주 배달시켰다. 우리는 직원이 벨을 누른 후 유명 피자 체인점 명을 외치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그 집 문 앞에 놓인 중국집 그릇을 눈여겨보기도 했다. 여자가 가을 분위기 물씬 나는 원피스를 입은 걸 본 날, 혜나는 손을 벌벌 떨며 급히 휴대폰을 열었다. 인터넷 쇼핑몰에 나온 신상이 틀림없다는 게 혜나의 주장이었다. 이거 맞지? 너도 기억하지? 혜나는 앞섶에 지그재그 문양 장식이 있는 원피스 가격이 59천 원이라는 사실에 더 격분했다.

내 돈은 안 주면서 먹을 거 다 사 먹고, 입을 옷 다 사 입고……. 이럴 수가 없어, 이럴 수가…….

 

여자가 구불거리던 머리를 스트레이트로 쫙 핀 걸 본 날, 혜나는 이웃돕기 한 셈 치고 5만 원을 포기하겠다던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혜나의 태도가 돌변하자 여자의 태도도 변했다.

많은 돈도 아니고 겨우 5만 원인데, 여태 안 돌려주면 어떡해요?

혜나가 따지자, 옆집 여자가 지지 않고 답했다.

그러게, 언니. 겨우 5만 원인데 뭘 그리 닦달하우?

혜나를 또박또박 언니라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여자는 별 좀스러운 사람을 다 봤다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문을 쾅 닫았다.

돈이 문제가 아니야, 절대 돈 문제가 아니라고.

어느 밤 혜나는 아몬드 한 알을 깨물어 먹다가 그렇게 말했고, 내가 벌써 10시가 넘은 시각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기도 전에 후닥닥 뛰어나갔다.

아니, 그 돈이 뭔 대수라고 이 밤에 애를 깨워, 애를 깨우길!

잘 밤이라는 이유로 여자의 목소리는 5만 원을 빌린 사람이 아니라 받을 사람처럼 당당했다. 그깟 5만 원 때문에 사람 잡겠네, 나 참! 그날 혜나가 대거리를 벌이지도 못하고 돌아온 건 여자의 아들 건이가 내복 차림으로 눈을 비비며 나왔기 때문이었다.

5만 원은 도통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혜나는 5만 원 때문에 숫제 제 명대로 못 살 것 같다고 했다. 돌려받을 5만 원은 더는 5만 원의 가치가 아니었다. 혜나 말에 의하면 그건 자신이 누구에게도 기만당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제 존재가 광활한 우주의 시시한 한 점이 결코 아님을 증명할 의미심장한 징표였다.

 

몇 번 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문을 여는 소리. 여자의 목쉰 듯한 소리가 뒤를 잇는다.

뒤져서 가져가든지.

물론 여자의 그런 대응도 처음이 아니다. 혜나는 이미 그 집에서 5만 원에 해당할 물건을, 아니 상징적인 아무거라도 집어올 태세로 쳐들어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여자가 막상 뒤져서 가져가라고 하니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이번에는 정말 뭐라도 가지고 나오려나? 설마 케이크를? 나는 서성이며 신경을 곤두세운다.

못 가져갈 줄 알아?

혜나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잠시 정적이 감도나 싶더니 옆집 여자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어지간하면 잘 들릴 텐데 여자가 너무 작게 말해서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나는 흡착기를 대듯 귀를 벽에 바짝 붙인다. 잘난……. 가져가라, 가져가. 그깟 5만 원…….

내가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5만 원이라는, 들어도 별 소용 없는 단어와 어깃장을 놓듯 외치는 가져가라정도다. 여자가 하는 말이 또 한참 이어진다. 뭐라는 거지? 뭐라고 하는 걸까?

아아아아아! 혜나가 별안간 길게 비명을 지르고, 우당탕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반사적으로 뛰어나간다. 양손으로 귀를 감싸고 있는 혜나와 그녀의 팔을 꼭 쥔 여자가 복도에 서 있다. 혜나의 손에는 케이크는커녕 과자 쪼가리 하나도 들려 있지 않다. 여자가 나를 보고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 나와 혜나를 번갈아 쏘아보며 말한다.

당장 내 혀 잘라서 정육점에 팔지 뭐. 까짓 5만 원 못 받겠어? 눈을 도려내랴? 5만 원짜리 사탕일 테니 맛있게 빨아 봐, 어디. 아니면 팔 잘라 줄 테니 갈퀴로 써. 모자라면 다리도 떼어 줄게. 가져가란 말이야, 그깟 5만 원. 내가 못 줄 거 같아?

내가 왜 들을 수 없었는지 곧바로 이해가 간다. 여자의 말은 지나치게 빠르고 무서우리만치 낮다. 혜나가 귀를 양손으로 감싼 채 머리를 마구 흔든다. 내가 혜나의 팔을 잡은 여자의 손을 간신히 떼어낸 후 우리 집 현관으로 들어서는 동안에도 여자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 귀 베어 가서 만두 해 먹어. 내 창자 떼어다 젓갈을 해 먹든지 빨랫줄로 쓰든지. 아무렴 5만 원 값어치 못하겠어? 그깟 5만 원, 가져가! 가져가라고…….

 

그날 이후 혜나는 ‘5만 원을 완전히 잊은 듯 군다. 빌려준 일도 돌려받으려 한 일도 전혀 없다는 듯…….

여자가 읊어댄 게 그 유명한 민요 징거미 타령과 흡사하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리고 내가 새우와 상관없이 몹시 징그러워 징거미 타령일 거라고 하자 혜나가 쑥 들어간 눈으로 나를 본 건 한참 후의 일이다.

 

'8면 > 미니픽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놈은 잡는다  (0) 2021.09.20
한 놈은 잡는다  (0) 2021.09.19
일그러진 진주  (0) 2021.05.07
어쩔 수 없이  (0) 2021.04.05
문제는 생존이야  (0) 2021.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