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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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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면/예술동향

제인 진 카이젠 개인전 《이별의 공동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9. 19. 21:16

제인 진 카이젠 개인전 《이별의 공동체》

 

아트선재센터에서는 2021729일부터 926일까지 제인 진 카이젠(Jane Jin Kaisen)이별의 공동체전이 열리고 있다.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덴마크로 입양된 개인사를 가지고 있는 카이젠 작가는 이전부터 한국전쟁과 위안부 속 여성 서사를 다룬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2013)와 제주 4·3 학살의 억압된 역사를 다루고 있는 <거듭되는 항거>(2011/2016) 등과 같은 작업으로 꾸준히 근대화로 나타난 경계 지점에서의 이별과 차별 문제를 다루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3채널 영상 설치 <이별의 공동체>(2019), 여섯 점의 라이트 박스 설치 <달의 당김>(2020), 2채널 영상 설치 <땋기와 고치기>(2020)까지 총 세 개의 작업이 전시된다.

특히 72분 길이 영상작업인 <이별의 공동체>2019년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도 출품하여 주목을 받은 작업이다. 작가는 2011년부터 한국 무속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고통받은 공동체 문제에 주목했다. 작업은 4·3 학살의 생존자이기도 한 제주의 무당 고순안의 굿 노래를 주축으로 4·3 학살을 살피고, 비무장지대(DMZ), 북한, 카자흐스탄, 일본, 중국, 미국, 독일 등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또한 이들의 목소리를 엮기 위해 고대 무속설화인 바리 설화를 가지고 온다. 바리 설화는 태어나자마자 여자라는 이유로 버려진 바리가 나중에 불치병에 걸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내용의 설화이다. 일반적으로 효도를 주제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별이 공동체>에서는 젠더적 한계를 뒤어넘은 신화로 읽는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작가는 바리 설화를 다룬 시인 김혜순의 책 여성, 시하다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별의 공동체>라는 제목도 가지고 왔다.

최신작인 <달의 당김>(2020)은 밀물에 드러나고 썰물에 가려지는 바닷가에 각종 사물들을 촬영한 사진 작업이다. 조수의 경계에서 용암석 위에 올려진 것들은 <이별의 공동체>에서도 등장한 황동 그릇, 과일, 쌀 등 제주의 해녀들이 기도할 때 바다로 던진 제물과 하얀 무명실 가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바다 위에 실금처럼 얹힌 흰 명실은 다른 작업인 <땋기와 고치기>(2020)에서 하나의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의 매듭으로 연결된다. 장수의 기원과 수명의 상징으로 흰 실타래는 동그랗게 앉아 서로의 머리를 땋아주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서로를 연결하고 봉합하는 위로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위의 작업들을 통해 전시는 소외된 장소, 사람, 사건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에 이번 학술 동향에서는 <이별의 공동체>를 학술적으로 분석한 두 가지 글을 소개한다.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비디오 스틸, 아트선제 제공

 

<바리데기 : 쓰레기, 유령, 이름 없는 존재가 어떻게 이별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가?>

김성례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카이젠 작가의 이번 작품은 김혜순 시인의 시론 여성, 시하다의 첫 챕터인 쓰레기와 유령에서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 바리데기 신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가져온 이 챕터는 버림을 받은 존재로서의 쓰레기를 유령으로 보고, 유령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이별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글이다. 이 글에 따르면 바리데기는 세 번의 버림을 받는데, 이는 세 번의 죽음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첫 번째 죽음은 딸이라서 버려짐을 의미하고, 두번째 죽음은 죽음을 담보로 하는 여행을 떠나기에 겪으며, 세번째 죽음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선택함으로써 맞는다. 여기서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점은 바리데기는 한 번도 이름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적도 없다는 점이다. 바리라는 뜻은 버리다에서 차용된 것일 뿐이다. 여기서 바리가 선택한 공동체는 끝없이 유동하는 여정의 공동체인 것이다.

 

아버지를 구하고, 아버지로부터 공동체 내부의 거주를 비로소 허락받았지만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 대신 자신이 죽음과 사람 사이의 경계, 반쯤 죽었고, 반쯤 살아있는 존재로서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역할을 맡겠다고 제안한다. 바리는 저쪽의 경험을 통해 공동체 밖의 장소, 다른 공동체의 장소, 영토 없는 공동체를 제안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의 장소를 발견한 다음, 그곳에 그 부재의 장소를 한없이 여행하리라는 의지를 표명한다. 아버지의 권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의 소임을 맡겠다는 의지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무당과 같은 중개자의 장소를 제안한다.”

김혜순, 여성, 시하다

 

이러한 죽음은 카이젠 작가의 작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카이젠이 선택한 바리라는 존재는 실제로 영화에서 형이상학적 초월적 언어로 채택이 된다. , 실제 바리공주 무가 구송의 굿 연행 장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모든 부류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에 (여성, 디아스포라, 이주민, DMZ) ‘바리의 이름을 부여하여 거처(inhabited space)’를 만들어주었다. 거처라는 용어는 김혜순 시인의 책에 나오는 용어로 바리 공주 신화는 이러한 여성성의 거처임을 나타낸다.

남계혈통의 가부장제 사회구조에서 주변적이고 불안정한 여성의 지위는 비천한 사회적 지위의 무당을 포함한다. 때문에 무조신 신화는 불안정한 여성이라는 존재가 절대적인 신이 된다는 근원적 타자성을 지닌다. , 이승의 현실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곳에 모성적 존재로 실재함으로써 완성되는 신화인 것이다. 이 같은 경우는 여성적 젠더 주체의 위치가 존재와 무, 생과 사, 성과 속, 이상과 물질, 침묵하는 언어, 과거와 미래, 비천과 신성 등 모든 대립항 사이의 경계에서 양편을 매개하는 카오스의 장소이며, 이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코라(chora)’와 같은 모성적 공간(maternal space)임을 입증한다.

이렇듯 바리공주 신화를 여성세계사적 관점으로 본다면, 바리공주의 여성으로서의 종속과 수난 경험은, 가부장제 사회의 유교적 효 이데올로기와의 협상과 투쟁을 통해 자립적인 여성주체성의 형성으로 진화하는 여성해방적 신화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여 재생하게 하는 대모신의 위엄과 초월적 모성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에이버리 고든(Avery Gordon)의 책 Ghostly Matters에는 유령에게 말을 할 권리를 허용함으로써 환대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정의롭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마르크스의 유령들(Specters of Marx)에서 인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유령을 이야기할 때, 엑소시즘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유령들이 나타났을 때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할 말이 있어서 나타난 것이다. 때문에 유령에게 말할 권리를 주어야 하고 그것이 정의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유령은 과거의 존재이기에 유령이 말하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데리다가 말하는 환대의 기억이 가능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카이젠의 작품이야말로 유령들의 말을 들어주는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카이젠의 작품에서는 버림받은 자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폭력의 구조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다. 이 폭력의 구조를 (home)’이라고 한다면 바깥으로 실종된 타자들이 바로 버림받은 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흔적, 형체가 없는 유령들로 존재한다. 카이젠의 작품은 유령에게 말을 걸어 스스로 증언하게 하며, 각기 다른 무늬를 가진 유령의 이야기를 엮어서, 하나의 기억의 벽걸이 타피스트리를 만드는 것이다. , 이 영상 자체가 하나의 타피스트리인 것이다.

 

 

공간으로서의 경계, 공동체로서의 디아스포라 :

바리-영화의 주름진 몸과 다성적 목소리

조혜영

 

제인 진 카이젠의 <이별의 공동체>(2019)는 한반도에서 모두가 한 목소리로 통일을 이야기할 때 헤어짐을, 모두가 평화와 화해의 가능성을 엿볼 때 폭력과 상처를 가리킨다. 카이젠은 통일과 평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죽음을 모두 기억하는 몸으로써 그것들을 시공간적으로 통과해내고 파열을 낸다. 여기서 조혜영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익을 고려하면서 남한과 북한 양자가 법적,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가 되는 것이 유일한 통일인가? 군대와 군사문화를 여전히 유지하면서도 단지 전쟁의 종결을 선언하기만 하면 평화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가? 한국전쟁 직전 미 군정 시기에 빨갱이 몰이3만 명의 시민을 학살한 제주 4·3 사건 같은 수많은 국가폭력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와 당사자들의 용서 없이 화해는 가능한가? 카이젠은 이 질문들 앞에서 작금의 식민주의적, 국가주의적,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적 틀이 구성한 평화와 통일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한국전쟁과 분단의 역사에서 국가폭력에 희생당하고 강제로 이주당하며 경계의 외줄을 타고 살았던 이름 없는 이들의 공동체를 호명한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공간에 사는 난민, 이산민, 이방인, 타자, 경계인, 주변인을 불러내기 위해 카이젠은 자신의 지난 15년간의 작업에서 끈질기게 탐구해온, ‘번역하는 여성주체의 관점으로 한국 근대사를 다시 써 내려가고, 그 여성사의 기원으로서 바리데기 신화를 소환한다.

이주(移住)는 근대 여성사의 핵심이다. 4·3 사건 당시 아버지를 잃은 제주도의 무당, 홀로 북한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탈북여성, 1910~20년대 조선을 점령한 일본을 피해 망명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로 이주했지만 스탈린의 명령으로 1930년대 후반 카자흐스탄 등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된 고려인(소비에트 한국인) 후손, 한국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 중 어느 한쪽의 국적을 선택하지 않아 국적이 없는 채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한국전쟁 후 남한에 주둔한 미군을 위무한다는 목적으로 세워진 미군부대 주변 클럽의 양공주라 불리던 성판매여성, ‘양공주여성과 미군의 결혼으로 인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그들 자녀와 후손들, 국가의 조직적 후원 하에 서구 유럽과 북미로 팔려나간 입양인들, 비무장지대라는 DMZ에서 한국전쟁 당시 유실된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잃은 여성 봉제 노동자. 작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내레이션으로 들려주고 있다.

작가는 오히려 이들의 얼굴이 아닌 목소리를 강조한다. 대신, 시각적으로는 자신이나 선조들이 거주했던 시공간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이산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그 시공간을 해석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개인으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집단적 역사의 해석자가 된다.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그녀들을 위로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무당은 오히려 얼굴이 강조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제의적 굿을 주관하고 잊힌 기억과 유령을 불러내고 만나게 하는 매개자이지만, 그 자신도 4·3 사건을 겪은 당사자들 중 한 명이다. 카이젠은 전략적으로 무당을 가시화하되 그녀가 주관하는 굿을 스펙터클한 이국적 행사로 그리기를 거부하면서 바리-무당 역사 추상적 기원이나 매개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이야기와 역사를 지닌 개체로서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은 작가 본인에게도 적용된다. 그녀는 누구보다 바리. 태어나자마자 아들을 바랐던 조부모에 의해 버려져 덴마크로 입양 보내졌던 이산민(離散民)이고, 제주도 출신 할아버지는 4·3사건 당시 투옥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카이젠 개인사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해 다양하게 버려지고 강제이주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여기서 카이젠은 무당과 같은 존재이다.

이방인으로서 타자들과 경계 없이 만나고 접촉하지만, 곧 거리를 두며 타자들의 간극을 인지하고 그들을 둘러싼 초국가적, 식민주의적, 군사주의적, 가부장제적 틀을 인식한다. 거리의 좁힘과 멀어짐은 진자처럼 반복된다. 그녀는 필름 메이커인 동시에 직접 영화에 출연하면서 해석자와 당자의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카이젠-영화바리-무당이지만 동시에 영화에 연하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매개자이자 해석자로서의 영화-무당은 그 신체 뒤에 아도 없는 것이 아니며, 누가 어디에서 발화하고 말 건네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카이젠은 바리-무당의 여성성, 즉 버려지고 흩어지고 기원과 이름이 없는 여성성이, 2015년 북한에서 열린 국제 여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DMZ를 건너 북한으로 방문했던 자신의 경험처럼, 시공간적으로 끊임없이 거리를 조정하며 이곳과 저곳을 동시에 바라보고, 매개되지 않는 것을 매개하고 협상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것은 카이젠과 무당뿐만 아니라 헤어짐의 공동체에 속한 모든 여성들이 갖고 있는 것이다.

 

아트선제센터 제공  

 

황지원 기자 h950301@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