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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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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면/미니픽션

한 사람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5. 29. 11:59

심아진 (동화가, 소설가)


  그날 밤, 나는 잠을 자다가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일어났다. 자기 전에 켜둔 수면등이 남편과 비슷하게 생긴 얼굴을 비췄다. 물 좀 가져오너라. 그는, 당당하게 말하는 것만이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 거침없이 내게 요구했다. 나는 그가 오래전에 돌아가신 남편의 아버지, 곧 내 시아버지임을 알아차렸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시아버지에게 건네주자 그가 급하게 들이켜며 말했다. 내가 물 한 잔도 얻어 마실 수 없는 입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시아버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으로 물 한 잔을 더 떠왔다. 시아버지는 갈증이 많이 났는지 두 잔째의 물도 금방 다 마셔버렸다. 생활이 나를 살렸다. 먹고 살기 빠듯했으니까,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았단 말이다. 나는 남편이 자주 ‘생활’을 언급하곤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아버지는 물방울이 묻은 입언저리를 야무지게 손으로 닦아낸 후 남편 옆에 반듯이 누웠다. 다시 잠들기 어려워진 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금방 코를 골았다. 나는 시아버지의 반대편, 그러니까 남편의 오른편에 누웠다. 

  또다시 누군가가 나를 깨운 것은, 하염없이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하는 꿈을 꾸던 와중이었다. 소의 연골처럼 허연 것을 무릎에 덕지덕지 바른 늙은 여인이 내 얼굴에 코를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그 희묽은 연골 같은 게 내 잠옷에도 묻었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척하기 위해 원래 자신의 표정을 잃어버린 내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는 아픈 무릎이 자랑스럽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듯 득의에 찬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알지 못해서 살 수 있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았다면 애들을 키워내지 못했을 거다. 남편은 늘 어머니의 무릎을 안쓰러워했다. 나는 남편 옆에 잠들어 있는 시아버지를 곁눈질하며 아까처럼 물이라도 떠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어머니는 내 생각을 알았는지 차갑게 말했다. 냉수라면 마실 만큼 마셨다. 내 아들이 너와 결혼했을 때부터 말이다. 시어머니는 거칠고 주름진 손으로 잠든 아들의 얼굴을 쓸었는데, 그 아들은 감은 눈을 씰룩였을 뿐 잠에서 깨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남편과 시아버지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사이에 누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잘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 자리에 도로 누웠다. 침대가 너무 비좁았다. 그러니까 두 명이 자면 딱 맞는 침대에 네 명이 누운 것이다. 그 바람에 남편의 살이 내게 아주 많이 닿았는데, 그의 피부는 땀이 배어 나와 끈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극도로 예민해져서 누군가가 또 다가오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다. 시아버지와 닮았으나 조금 더 투박한 주름을 가진 그 사람은 시아버지의 아버지쯤으로 보였다. 뭐가 필요하세요? 나는 일어나 앉으며, 그가 나를 두드리거나 흔들지 않아도 내가 이미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우리 시절엔 말이다. 그는 ‘우리’의 ‘리’자를 약간 늘이며 세게 발음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다소곳해 보일 수 있는 자세로 섰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조상님’에 해당하는 분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내게 아무것도 부탁하거나 명령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기도 낚았고, 닭도 잡았고, 장기도 두었고, 장례도 치렀다. 가끔은 아편 같은 걸 하다가 패가망신하기도 했고 투전판에서 가산을 탕진하기도 했지. 아무튼 우리는 늘 우리였다. 나는 그가 강조하는, 그리고 평소 남편이 지나친 집착을 보이기도 하는 ‘우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서 팔짱을 꼈다. 아마 다소 건방져 보이는 동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다소곳하든 건방지든 상관없다는 듯 나의 자리, 곧 남편의 오른쪽을 차지하고 누워버렸다. ‘우리’였던 당신의 시절엔 그렇게 하는 게 자연스러웠다는 듯이.

  졸지에 자리를 빼앗긴 나는 일렬로 늘어선 발을 바라보며 침대 아래쪽에 서 있었다. 하얗거나 붉거나 시커먼 발바닥들은 최선을 다해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려는 듯 다양한 모양의 굳은살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하릴없이 내 두 발을 비벼댔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그때 내 착각을 짚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듯, 잠든 줄 알았던 시아버지의 아버지가 실눈을 뜨고 한마디 했다. 나는 네 시조부가 아니라 시증조부다. 나는 어쨌거나 그를 조상님으로 여겼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잠을 아예 포기해 버리고 침대에 누운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정말 잠이 들었는지 잠자는 척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잠자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처럼도 보였다. 그들은 앞사람을 놓치지 말라는 잔소리를 수도 없이 들은 소풍 나간 유치원생들처럼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침대 양옆에 늘어진 시증조부의 오른손과 시아버지의 왼손 중 하나를 내가 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 모두 사진으로 본 기억이 났다. 제 남편의 선생님들이시죠? 그들은 기특한 제자를 바라볼 때 짓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내가 그들의 제자는 아니지만 제자의 아내라면 제자나 마찬가지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중 머리가 벗겨진 선생이 피곤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비비며 입을 열었다. 다 알려줄 수는 없었다. 나 역시 내가 배운 한도 내에서 가르칠만한 것을 가르쳤을 뿐이야. 어쩐 일인지 나는 좀 화가 나서 따지듯 물어보았다. 어떤 기준에서 가르칠만한 게 있고, 가르칠만하지 않은 게 있다는 겁니까? 다른 선생이 대머리 선생을 대신해 비감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선생이 우리에게 가르친 대로, 그저 배운 대로 가르쳤을 뿐이라니까. 내가 작게 뇌까렸다. 또 우리군요. 그들은 내가 왜 ‘우리’에 민감해하는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탄식하듯 말했다. 우린 지쳤다. 그만 자고 싶구나. 나는 붙박이장에서 이불을 꺼내 침대 발치에 펼쳐주었다. 두 선생은 나란히 누워 마주한 쪽의 손을 맞잡았다. 침대 가까이에 있는 선생이 남편의 발에 손을 얹는 것을 보면서 나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들은 남편의 발이라도 잡고 있다면 굳이 침대에 눕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스승들의 방문을 알았다면, 남편은 당장 술상을 봐야 한다며 부산을 떨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깊은 수면 상태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누군가가 또 들어왔다. 녀석과 나는 민감한 시기를 같이 보냈죠.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느닷없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는 방이 밀폐되어 있으며, 창문을 열지 못할 날씨라는 것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재떨이를 가져다주었다. 예전의 남편처럼 그도 엄지와 검지만으로 담배를 쥐고 피우는 습관이 있었다. 친구는 추억을 씹기라도 하듯 필터를 꼭꼭 씹어대며 담배를 피웠다. 우리에게는 말 못 할 사연들이 진짜 많아요. 남편의 친구는 내가 모르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려는 듯했다. 남편은 이제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아요. 내가 말했지만, 친구는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비밀은 여러 개의 가면을 갖고 있다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최선의 걸 쓰곤 하죠. 맛있게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그가 갑자기 남편 위에 쓰러져 잠들었다. 남편은 가슴이 답답한 듯 몸을 꿈틀거렸지만, 잠결에라도 친구를 밀쳐내지는 않았다. 나는 좀 울적해졌다.

  어때요? 살아보니. 화장을 곱게 한 여자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밤에 방문한 사람답지 않게 정갈한 차림의 여자였다. 나는 그녀의 손이 남편의 발목을 더듬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누구세요? 나는 그녀가 남편과 오래 연애를 했다는 대학 때 동기인지, 아니면 미처 나에게 털어놓지 못한 다른 여자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누구시냐고요? 신경질적인 내 질문을, 여자는 의도적으로 그러려는 게 아니나 어쨌든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태도로 무시하며 제안했다. 출출한데 맥주나 한잔할래요?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가져왔다. 여자가 자신감 있는 태도로 마개를 따며 말했다. 같이 살아보지 않아야 알 수 있는 게 있다는 거 알아요? 여자가 내게 물었다. 나는 비밀 운운하던 남편의 친구가 아직 잠들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를 깨워 여자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나는 어른 다섯이 누운 데다 한 여자가 걸터앉은 불가사의한 침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여자의 손은 남편의 발목을 거쳐 무릎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 손길이 내 몸에도 닿고 있는 듯해 기분이 묘했다. 도대체 누구세요? 내가 애원하듯 묻자 여자가 남편의 다리 위에 숫제 몸을 누이며 말했다. 글쎄, 내가 누구일까요? 어쩌면 당신과 당신 남편에게는 없는 ‘사이’? 나는 갈증을 많이 내던 시아버지처럼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느새 여자는 잠들어 있었다.

  잠을 자는 그들은 실로 다양한 소리를 냈다. 어금니를 갈거나 앞니를 딱딱거렸고, 한숨을 쉬거나 코를 골았으며 가끔 쩝쩝,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하여 침대 시트와 이불들이, 이가 딱 맞게 들어앉지 못한 신뢰나 애정 따위를 말아 감기 위해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제대로 소각시키지 못한 미련이나 미움을 뒤늦게야 발견한 베개가 부산스레 풀썩이는 소리도 들렸다. 종일 끓고도 한참을 더 끓어야 할 곰국처럼 고글고글, 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그림_유지안

  그 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남편과 나의 침실로 찾아왔는지 다 얘기하는 것은 지루한 일일 것이다. 남편의 힘센 고모와 간이 좋지 않았던 외삼촌, 함께 다락방을 들락거렸던 사촌 형을 비롯해 남편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의 첫사랑, 그리고 울퉁불퉁한 감정을 공유했던 직장 상사들까지,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쉬지 않고 불어났다. 그들은 여럿이 소란스럽게 들어오기도 했고 슬그머니 혼자 들어오기도 했으며, 스스럼없이 내게 먹을 것이나 마실 것, 잠자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곧 냉장고는 텅 비었고, 내어줄 이불과 베개도 동이 났다. 방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심지어, 틀림없이 세종대왕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인물도 있었다. 그들은 병렬 혹은 직렬로 연결된 꼬마전구들처럼 가로로 혹은 세로로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정글의 넝쿨처럼 아무렇게나 얽혔다. 누군가는 복잡한 삶의 맥락을 고의적으로 단순하게 만들려는 듯 꼭대기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나는 더미 아래 깔린 남편이 숨이나 제대로 쉬고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이제 쪼그려 앉을 수도 없게 된 나는 내가 아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사람들의 더미를 조금 헤집어 보았다. 남편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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