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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12. 4.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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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아진

소설가, 동화작가

 

그림/유지안

 

 

성준은 차휘랑의 하숙집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다소 낡았으나 운치 있는 건물인 데다 월세가 비싸지 않고 무엇보다 식사가 제공되는 점이 흡족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임용고시에 도전하기로 한 성준은 혼자 밥을 해 먹거나 사 먹는 데 질려 있었다. 성준은 차휘랑이 자랑스레 보여준 빨래 건조기 앞에서 입주를 결심했다. 살짝 걸리는 건, 겨우 스물두 살인 젊은 남자가 집주인이며 다소 이상한 말투를 쓴다는 정도였다.

제날짜에 하숙비 입금하소. 그건 정말 중요하요.

차휘랑은 성준이 궁금해할 걸 이미 예상했다는 듯, 그런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다는 듯 내처 말했다.

내 말투가 할머니 말투요. 오래 같이 살던 할머니가 이 집을 물려주고 돌아가셨소.

말하는 걸 들어서인가, 머리숱이 많고 피부가 뽀얀데도 차휘랑은 왠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네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성준은 바로 계약을 했다. 차휘랑이 마지막으로 내민 서류에 촌스러운 필체로 안내라 직접 적고 복사한 듯한 종이가 있었으나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다. 하루 한 번 창문 열어 환기, 한 달에 한 번 대청소, 야간 샤워 금지 등 읽어보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는 사항들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무연해 보인 그 종이에 몹시 기이한 항목도 함께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이삿짐을 옮긴 날 성준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김민수, 그리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한별과 인사를 나누었다. 김민수와 한별은 차휘랑이 청소며 요리며 얼마나 딱 부러지게 해내는지 모른다며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

할머니 상 치른 후에 제 방을 다용도실로 옮기고는 방 세 개를 세 놓아 그걸로 생활비를 벌어요. 어린데 보통 야무진 게 아니에요.

차휘랑이 인터넷으로 요리 강의 듣고 실습하듯 음식을 만드는데, 꽤 먹을 만하다니까요?

성준은 차휘랑의 노인네 같은 말투쯤은 기꺼이 감수하리라 마음먹었다.

단순히 말투만이 아니라 차휘랑의 사고도 옛날 옛적 사람 같다는 걸 알게 된 건, 우연히 하숙집의 모두가 식사를 함께하게 된 어느 일요일이었다. 각자가 뷔페에서처럼 동그란 접시에 반찬을 담고 앉아 밥을 먹는 중에 차휘랑이 느닷없이 소리를 높였다.

민수 씨, 그리 숟가락, 젓가락을 한꺼번에 쥐면 복 나가요. 그라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소.

김민수는 흠칫 놀란 듯하더니 왼손으로 숟가락을 잡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성준은 네가 뭔데 참견이냐고 하기보다 주눅 든 듯한 태도로 순순히 차휘랑의 지시에 따르는 김민수를 놀라 바라보았다. 김민수만이 아니었다. 식탁 아래로 내내 다리를 떨고 있던 한별이 갑자기 동작을 딱 멈추었다. 차휘랑에게 한소리 듣기 전에 자각해서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모습이라 성준은 더 놀랐다.

이후로 성준은 차휘랑의 케케묵은 잔소리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지곤 하는 걸 자주 목격했다.

, 집 거미는 죽이는 거 아니랬잖소.

문지방 밟으면 안 돼요. 제발 좀 신경 써서 넘어 다니소.

성준은 잔소리가 제게 쏟아지지는 않았으므로 다소 신경이 쓰여도 참았다. 성준마저 차휘랑으로부터 쓴소리를 들은 건 종일 비가 내린 어느 날이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도서관에서 일찍 돌아온 성준이 방에 우산을 펴 놓았을 때였다. 차휘랑이 지나가다 열린 문틈으로 그걸 보고서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뭔 일이고. 이리 우산을 펴 놓으면 가난살이 못 면하요. 얼른 접으소.

성준은 더는 참지 않았다.

차휘랑 씨, 내가 내 방에서 우산을 펴든 접든 무슨 상관이에요?

차휘랑은 진지했다.

가난 구제는 임금님도 못 한다는 말 못 들어봤소? 실내서 우산을 펴 놓으면 돈이 줄줄 새요.

성준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항의하자, 차휘랑이 걱정하는 표정에서 돌연 화난 표정이 되더니 거칠게 말했다.

안내서에 다 적혀 있지 않소. 지키기 싫으면 당장 나가소.

성준은 멍해졌다. 곧 서랍을 뒤져 서류를 찾아보았다. 다시 봐도 촌스럽기 그지없는 필체로 적힌 안내를 비로소 꼼꼼히 읽었다. 성준은 곧 몇 개를 제외한 항목 대부분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 평범한 하숙집에서 내놓을 법한 지침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이는 흔히 미신이라 부를 만한 온갖 잡다한 금기 사항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며칠 후 차휘랑에게 걸린 건 한별이었다. 한별이 집을 나서면서 제 방 쓰레기를 버리려는 걸 차휘랑이 극구 말렸다.

글쎄. 뒀다가 저녁에 버려요. 아침에 버리면 부정 탄다잖소.

냄새나서 그래요. 여기 버리는 게 그러면, 가지고 나가서라도 버릴게요.

하지만 차휘랑은 완강했다.

내가 한별 씨 위해 이러는 거잖소. 제발 말 좀 들어요.

차휘랑은 한별 손에 든 쓰레기봉투를 강제로 뺏다시피 해 방에 도로 넣었고, 한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대로 집을 나섰다. 오후에 성준은 같은 도서관을 쓰는 김민수를 휴게실로 불러내 집주인의 괴이한 태도에 대해 불평했다. 김민수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런데 형, 그게 다 틀린 말은 아니라니까요.

뭐라고? 그런 미신을 믿어?

김민수가 얼마간 난감한 얼굴로 성준 이전에 살던 사람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처럼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밤늦게 머리를 감았다고 했다. 일찍 잠드는 편인 차휘랑이 어찌 그 소리를 들었는지 방에서 튀어나와 욕실 문을 두드려댔다. “한밤중에 머리 감으면 안 된다고요. 제발 그라지 마소.” 그러나 전 세입자도 성준처럼 차휘랑의 안내에 반감이 많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틀 후에 그 친구, 부고를 받았다니까요? 자정에 머리를 감으면 부모나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신다는 말 그대로…. 아버지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는데 어찌나 소름이 돋던지…. 그 친구, 상 치르고 돌아와서 바로 방 빼고 나갔어요.

김민수는 말을 마치고서 부자연스럽게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렸다. 성준은 그게 재수 없는 소리를 했거나 들었을 때 침을 뱉거나 한쪽 발로 뛰거나 하는 행위와 같으리라 짐작했다.

 

성준은 황당했다. 소위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고릿적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한 차휘랑의 말에 놀아나다니, 그야말로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 괄호 속에 설명까지 달아놓은 금기 사항 중에는 평소에 딱히 위반할 일이 없는 것도 많았다. 가령 밤에 손톱, 발톱을 깎지 말라거나 가위를 편 채 두지 말라거나 하는 건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이미 그리 하고 있었다.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야밤 휘파람 금지 역시 밤이고 낮이고 휘파람 불 일이 없는 성준으로서는 신경조차 쓸 필요가 없는 사항이었다. 

신기한 건, 김민수와 한별이 이런 것들을 무시하기는커녕 노력해서 지키려 한다는 점이었다. 가령 한별은 다리 떠는 걸 차휘랑이 볼 때만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도 문득 떠는 걸 의식하곤 저 스스로 제 다리를 누르곤 했다. 언젠가 길에서 만 원을 주웠다며 치킨을 사서 들고 온 김민수는 공돈은 곧장 써버려야 해.”하며 포장을 풀었고, 이에 한별은 아무렴, 도깨비 돈은 도깨비처럼 써야죠.”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 역시 안내에 있는 내용이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날이었다. 김민수는 종합시험을, 한별은 직장 면접을, 성준은 임용고시를 앞두고 있었으므로 다들 얼마간 초조한 상태였다. 성준은 차휘랑과 김민수가 은밀히 무언가를 주고받는 걸 보았다. 김민수가 고맙다는 듯 받아든 종이봉투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몹시 중요한 물건임이 분명해 보였다. 며칠 후에 성준은 한별이 소파에 앉아 미친 듯 발을 떨다가 손으로 누르다가 다시 떠는 걸 보았다. 면접 때문에 그러려니 싶었다. 성준은 나서서 위로 같은 걸 할 입장이 아니었으나 자신 역시 긴장을 풀고 싶은 마음이라 한별에게 술 한잔을 제의했다.

식탁에 앉자마자 한별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혹시 형님도 받은 건 아니죠?

? 누구한테?

차휘랑이 민수 형님한테는 벌써 그걸 줬단 말이에요. , ….

성준은 한별의 얘기를 듣고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차휘랑이 돌아가신 할머니가 입던 속옷을 김민수에게 주었다는 거였다. 여자 속옷이 시험을 잘 보게 해 준다는 속설에 따라…. 한별은, 차휘랑이 할머니 속옷이 몇 개 남지 않았다며 제게 주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며 투덜댔다. 성준은 고3 때 입시를 잘 치르려고 여학생이 깔고 앉은 방석을 훔치는 애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으나 이건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허무맹랑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별은 진지했다.

차휘랑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할머니 속옷을 입고 있어서 전사하지 않았대요. 이전에 제 방에서 살다가 나간 사람도 그 덕에 가볍게 외무고시 패스했다니까요.

성준은 적당히 좀 하라며 퉁을 놓았으나 저도 모르게 한별이 혼자 술 따라 마시려는 걸 제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차휘랑의 안내에 적힌 자작 또는 첨잔 금지(앞에 앉은 이가 자작을 하면 재수가 없다.)’ 항목을 떠올려서는 아니라고 자위했으나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다음 날 성준은 일부러 늦잠을 자고 일어나 허둥대는 척을 했고, 김민수와 한별이 나가기를 기다려 조용히 차휘랑에게 다가갔다. 부탁하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차휘랑은 오래 살아 알 거 다 안다는 듯한, 예의 노인의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아진·유지안 작가님의 미니픽션은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아름다운 글과 그림을 건네주신 두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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