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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면/미니픽션

만유의 기억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1. 10. 18. 16:52

 

만유의 기억

심아진

 

명민은 부지런히 명함을 주고받으며 악수를 했다. 열세 살 소년의 얼굴을, 20년 만에 만난 수염 거뭇한 남자 어른들에게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도 여전히 친한 정욱이 불러내지 않았더라면 나오지 않았을 자리였다. , 예성이구나, 라고 말하거나 김철민, 몰라볼 뻔했다, 라며 놀라는 와중에 누군가가 명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반갑다, 서명민.

그러나 명민은 거구의 사내가 건넨 명함에서 이름을 읽고도 도무지 그를 기억해낼 수 없었다. 류지호라고?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으나 명민은 내색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학과장에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하며 말을 꺼냈다가 따끔하게 혼이 난 이후로 여간해선 그리 말하지 않았다. 명민은 제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겸손하게 전제하기 위해 한 말이었으나 학과장은 그걸 모르쇠로 일관하려는 무책임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명민은 잡은 손을 어설프게 흔들며 말했다.

. 오랜만이야.

류지호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명민에게 물었다.

서로 좋아하면서도 계속하는 전쟁을 뭐라 하게?

명민이 황망한 표정을 짓자 류지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러지 않았으면 서운했으리라는 듯 날름 말했다.

반가워지, 반가워.

류지호가 발음을 굴리며 껄껄 웃자, 그제야 명민은 그게 허무맹랑한 아재 개그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지호 진짜 웃겨. 내가 이래서 쟤 좋아한다니까.

옆에 앉은 정욱이 명민의 잔을 채워주며 킥킥거렸다. 명민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 싫었지만 소곤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쟤 기억 안 나는데.

정욱이 고기 한 점을 입에 욱여넣으며 말했다.

어떻게 류지호를 모르냐. 지호가 오늘 이 자리 만든 거야. 지호가 안 불렀으면 나도 너도 여기 안 왔지.

정욱은 류지호를 모르는 명민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명민은 정욱의 눈에서 그러니 네가 여태 그 모양이지, 라거나 이제 나도 지친다, 지쳐, 하는 식의 푸념을 보지 않으려고 얼른 술잔을 들이켰다.

지호가 혜영이를 소개했잖아. 내 인생의 구세주라 할 수 있지.

정욱이 언급한 송혜영이라면 명민도 잘 알았다. 거의 2년 넘게 정욱이 진지하게 만나는 상대였다. 그러나 류지호가 두 사람을 이어줬다니 금시초문이었다.

명민은 모임을 주선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동창을 저 혼자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 약간 의기소침해졌다. 학과장에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이라고 한 게 실은 정말로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려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혹시 외모가 엄청나게 달라진 걸까? 명민은 떼돈을 버는 방법이 뭔지 알아?”라며 또 다른 우스갯소리에 열중한 류지호를 쳐다보았다. 해동 중인 동태처럼 탄력 없어 보이는 얼굴, 가끔 술빵에 박혀 있기도 한 건포도처럼 폭도 길이도 다 작은 눈. 성형이나 체중 관리를 한 듯한 외모는 아니었다. 명민은 녹슨 가위에 치약이며 레몬, 심지어 콜라까지 묻혀 문지르던 때처럼 기억의 녹을 닦아내려고 애를 썼다.

별안간 한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큰 키에 구부정한 등. 이유도 없이 세상 모든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듯 주눅 들어 있던 소년, 유지렁이었다. 혹시 유지렁이 류지호? 글자 하나만 같아도 그 글자가 들어가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짓곤 하던 시절이었으니, 류지호가 유지렁으로 불렸을 가능성은 없지 않았다. 특별히 따돌림을 당하지 않았어도 왠지 겉도는 듯 보였던, 마지못해 불릴 일이 있어도 결코 제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별명에 걸맞게 모두가 얼마간 무시하기도 싫어하기도 했던 아이였다.

류지호, 쟤 유지렁이야?

명민이 작은 소리로 정욱에게 물었으나 정욱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유지렁? 그게 누군데?

명민은 유지렁을 설명할 수 없었다. 밟으면 꿈틀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퍼억, 하고 터져버릴 듯한 인상을 주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명민은 예전에 PC방에 종종 함께 다녔던 예성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며 물었다.

너 류지호랑 친해?

그럼. 엄청 친하지. 쟤랑 나랑 어렸을 때 PC방 죽돌이였잖아.

명민은 말문이 막혔다. 예성과 PC방에까지 드나들었다는, 그것도 죽돌이였다는 류지호를 어째서 자신만 기억해낼 수 없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류지호는 유지렁이 아닌 것 같았다. 옆자리, 앞자리 할 것 없이 싹싹하게 술잔을 권하는, 자신감 넘치고 쾌활해 보이는 류지호와 유지렁의 이미지는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류지호가 딱 기분 좋을 만큼 취한 듯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술이 뭔지 알아?

좌중이 눈에 띌 만큼 조용해졌다. 어린 시절 학교 선생의 질문을 받았을 때처럼 모두가 진지한 표정이었다. 류지호가 싱겁기 그지없는 답을 내뱉었다.

입술!

다들 미친 듯 웃어대자 류지호가 눈 만큼이나 작은 입술을 둔하게 옆으로 늘였다. 그 순간 어떤 이미지 하나가 명민의 뒤통수를 뚫고 들어왔다. 음험한 미소! 유지렁의 진짜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소만큼은 너무 뚜렷했다. 기억하건대, 10대 아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유지렁을 싫어한 게 아니었다. 유지렁은 별명에 어울리게도 지렁이처럼 기분 나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특히 웃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미소가 그랬다. 어쩌면 유지렁이 누군가와 누군가를 이간질했을 수 있었다. 혹은 아이들 간의 비밀을 은밀히 선생에게 일렀을 수도 있었다. 실체가 떠오르지 않았으나 명민의 느낌은 점점 선명해져 갔다.

 

맥줏집으로 자리를 옮긴 후 명민을 포함한 몇몇이 골목에서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피웠다. 류지호가 철민에게 담배 한 대를 얻으며 말했다.

끊었는데도 술 마시면 꼭 피우고 싶단 말이야.

술 마시고 피우는 담배가 제일 맛있잖아.

명민은 철민이 한 손으로 라이터를 감싸며 류지호에게 담뱃불 붙여주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 공손한 태도라 동기간이라기보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선후배 관계 같았다.

명민은 담배를 문 류지호의 뺨에 보조개가 잡히는 걸 얼핏 보았다. 또다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날 장땡이라 불리던 같은 반 여자아이가 느닷없이 유지렁의 뺨을 쳤다. 뜻밖에도, 따귀를 날린 장땡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장땡의 눈물보다 유지렁의 보조개가 더 명민의 눈에 박혔던 건, 거의 귀엽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살짝 팬 보조개가 투미한 유지렁의 모습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명민은 담배를 피우는 내내 류지호의 뺨을 흘끔거렸다.

술집으로 들어간 명민이 이번에는 성수에게 물었다.

너 혹시 장땡 기억나?

기억나지. 유명했잖아. 좋게 말하면 여장부, 나쁘게 말하면 여자 깡패.

그때 장땡이 유지렁의 뺨을 때렸던 것도 생각나?

장땡이 때린 애가 어디 한둘이었겠냐만 유지렁이라니 모르겠는데, ?

명민은 성수의 눈빛이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맥줏집 천장 구석에서 느리게 돌아가는 조명 탓일 수도 있었다.

그만 좀 하고 술이나 마셔.

바투 붙어 앉은 정욱이 명민을 나무랐다. 명민은 찜찜한 기분이었으나 정욱의 말대로 술이나 마시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류지호가 유지렁이든 아니든 상관없지 않은가. 명민은 제가 자꾸 어린 시절 일을 곱씹는 게, 그러니까 류지호가 유지렁이라 추측하는 이유가 자격지심에서 기인한 열등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사 자리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여기저기 헛물만 켜고 있는 자신에 비해 성공한 듯 보이는 동창에 대한 낯부끄러운 질투 같은 거랄까. 명민은 마침 건배를 제의한 류지호의 술잔에 기꺼이 잔을 맞추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류지호가 유지렁이든 아니든 다들 현재의 류지호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류지호의 말에 성실히 응대하는 현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현수는 어렸을 때도 또래 같지 않게 점잖고 너그러워 누구나 형처럼, 오빠처럼 여겼다. 명함에 찍힌 사회복지법인 소망은 자애롭고 선량한 현수 이미지에 잘 어울렸다. 어릴 적 그대로 명랑하고 똑똑해 보이는 영우도 류지호의 아재 개그를 진심으로 즐기는 듯했다. 명민은 보험설계사라는 영우가 행여 가입을 권유하기라도 할까 봐 지레 경계부터 했던 자신이 오히려 속물처럼 여겨졌다. 명민은 있는 그대로의 자리, 그러니까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나 마음껏 취하는 자리를 즐기기로 했다.

 

두꺼운 철문이 달린 첼로라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명민은 1, 2차 술값을 모두 류지호가 계산했다는 걸 알았다. 류지호가 건넨 명함을 슬그머니 다시 꺼내 보았다. ‘JH기획 대표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혼자 술값을 다 낼 정도라니 놀라웠다. 명민이 과일 안주며 양주 등을 흘깃거리고 있는데 류지호가 옆에 앉더니 말했다.

박진성 학과장 나랑 친해.

명민은 깜짝 놀랐다. 류지호가 무슨 수로 자신의 학과장 이름까지 아나 싶었다.

나랑 라운딩 멤버야. 언제 한번 같이 보자. 자리 마련할게.

류지호의 뺨에 다시 보조개가 팼으나 명민은 더는 유지렁을 떠올리지 않았다. 대신 책상에 서류를 던지고서도 분이 덜 풀린 학과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억은 과거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현재를 통해 재구성되는 거야.” 명민은 학과장이 옆에 있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재빨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러니까 만유의 기억을 부여잡았다.

나야 좋지. 고맙다.

명민은 가히 막역지우라 할 만한 지호와 경쾌하게 술잔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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